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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남편

솜비누 2022. 7. 8. 13:58

 포근한 날씨―아니, 쌀쌀한 날씨였을지도 모른다. 공주의 방에 초대된 햇살의 설렘은 따스했지만, 초대받지 못한 바람이 창문 밖에서 죄 없는 나뭇잎들에게 시샘 어린 화풀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날은 여행하기 좋은 날씨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모국을 떠나는 날로도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 손 위에 있는 고급 양피지는 특별한 여행자이자 유별난 손님이 이곳에 올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양피지가 멋스러운 잉크로 자신을 꾸민 곳은 이웃나라인데, 당국은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현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에 대하기 껄끄러운 이웃사촌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한 나라다.

 양피지에게 멋진 옷을 입힌 자는 당국의 공작으로, 본국의 왕이 아닌 공주와의 대면을 간청해왔다. 다만, 최소한의 고용인들만 거느리고 나와달라고 공작은 부탁했다. 신변에 위협이 갈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된다는 추신과 함께 귀띔이 끝났다.

 의문은 이따금 흥미라는 강력한 무기로 바뀌기도 한다. 그 무기는 나의 지루함을 찔렀고, 나는 항복을 외치며 흥미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만남을 수락했을 때의 난, 내 몸에서 불행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공작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하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그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난 최소한의 고용인으로 발탁된 믿음직스러운 하인과 하녀에게, 접견 장소로 내 방을 골랐으니 기일에 잘 준비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앤과 시몬이 '공주님의 방에서 직접 손님을 맞는 것은 위험하다'며 아무도 모르게 할 테니 응접실을 쓰자고 나를 타일렀다. 나는 결국 소꿉친구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으나, 그들의 제안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투덜거리는 공주님을 모시고 있는 하인과 하녀도 그런 기대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의 고용인을 원했기 때문에, 시몬은 방금 혼자서 손님 맞이를 위한 응접실 준비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공주님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나의 뒤에서 걷고 있는 하인은 바쁜 일정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것은 나의 투정거리를 하나 늘린 꼴밖에 되지 못했다.

 어느 길이든 벗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앤과 시몬에게도 이야기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금방 지나가게 된다는 통념대로 우리는 곧 응접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시몬이 앞으로 나서 문을 열었고,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앤이 따라 들어왔을 것이고, 시몬이 문을 닫음으로써 행차가 끝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보기 드문 풍채를 가진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분명 공작일 것인데, 그의 옆에는 양피지가 미처 알려주지 않는 어린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디저트를 먹는 공작의 옆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나는 그들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공작 부부가 나를 아는 체한 것은 시몬이 테이블로 다가갔을 때였다. 원래 얼마만큼의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우리 중 오직 시몬만이 알고 있었고, 따라서 무엇이 부족한지 역시 시몬만이 깨달을 수 있었다. 시몬은 테이블 위의 다과를 잠시 살피다가 공작 부부에게 상체를 숙여 실례의 뜻을 표현하고는 문을 나섰다.

 공작 부부의 시선은 나가는 시몬을 향해 있었지만, 그 길을 나와 앤이 막고 있었다. 부부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부인은 드레스를 들어 살짝 앉았다 일어나는 것으로 인사를 끝냈고, 공작은 다가와 내 손등에 의례적으로 접문을 하며 인사했다. 부부의 인사를 받고 나서야 우리 모두―정확히는 공주와 귀족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공작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늙은 공작은 다과를 먹거나 그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여인네들을 훑어보기에 바빴고, 공작 부인은 앤을 부리는 것에 바빴다. 하녀인 앤이 상급자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꼴은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만, 내성은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공작 부부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었다. 부부는 태도 교정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시에 두 명을 돌볼 수는 없었고, 내 생각에는 공작부인의 태도를 고치는 것이 더 시급해 보였다. 부인에게 주의를 줘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눈치 빠른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존경하는 홀리나이트 여왕폐하와 맞는 격을 가진 자리가 된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공작 부인이 나에게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는 첫 만남부터 격이 없었지만, 부인은 겉보기라도 격 있어 보이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상대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을 테지만, 공작부인은 무언가를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여왕이 아니라 공주입니다."

 "어머,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곧 여왕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본국의 국왕께서 임기를 다할 나이를 바라보고 계시니까요. 물론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남자가 있긴 하나, 파티에 미쳐 산다는 하등한 개최자 따위를 그 무거운 자리에 앉히진 못하실 테죠."

 "말이 지나칩니다, 공작 부인."

 

 공작부인이 내 아랫사람이었다면 곧바로 역정을 내었겠지만, 부인은 나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는 본국의 귀족이 아니었다. 부부가 그들의 국가에서 신망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내 멋대로 화를 낼 수 없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그리고 이 나라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왕에게만 피해가 간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했던 나라를 내 손으로 망가트리는 짓을 할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이 나라에 군림하신 세월은 길다. 내가 나 자신을 자라게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동안, 아버지는 분명 그 뒤에서 내가 낭비한 시간을 대어 주셨을 것이다. '그'를 왕위에 올리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의 파티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야 있겠지만, 타국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에겐 '그'를 길들일 자신이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그 자체가 가장 멋질 테니까.

 그런 이유들로 나는 화를 참았다. 그렇지만 공작부인은 본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나에 대한 악명―아랫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시시때때로 짜증을 내는 웃지 않는 공주님을 보고 싶었는지 나를 더 도발하려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개최자가 이 자리에 없다는 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아무리 비밀스러운 자리라고 해도…. 여자로서 낭군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시나 봅니다. 오호호."

 

 공작 부인은 공작의 옆에 바짝 붙어 부채로 입술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었다. 늙은 공작은 자신의 팔을 감싸는 보드라운 부인에게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었다.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디저트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공작의 식탐이 그들을 뱃속으로 납치한 모양이었다. 공작의 욕망은 더 많은 것들을 필요로 했고, 나는 '그'를 필요로 했다. '그'에겐 분명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재능이 있을 테지만, 과열된 내 머리는 '그'가 아니면 이 열을 식힐 수 없을 거라는 어리석은 착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 최대한 무덤덤하게 말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를 구태여 부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나 혼자 온 것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남자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지만 공작부인이 그를 보기를 원하니 불러 마지 않을 수가 없군요. 앤?"

 

 나는 앤에게 기품 있는 눈짓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화풀이하고 말았다. 공작부인에게 보내야 했을 거대한 분노를 애꿎은 앤이 느꼈을 테니까.

 앤은 실례한다는 몸짓을 우리에게 보이며 응접실을 나갔다. 앤이 '그'를 데리고 오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는 또 다른 파티를 준비하느라 바쁠 것이다. 어쩌면 '그'의 행방조차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나의 걱정들을 공작부인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장 쉽게 지을 수 있는 품위 있는 표정이었다. 상대에게 웃음 지을 수도, 짜증 낼 수도 없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근엄한 표정이었다. 나의 무표정에 공작부인의 기세가 누그러진 듯 보였지만, 그녀는 나를 조롱하는 것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일개 하녀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참으로 백성을 위하는 여왕님이십니다."

 "공작부인. 나는 부인이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그런 과분한 지위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나를 조롱하려는 생각이려거든 당장 그만두어줬으면 합니다. 공작부인은 공주인 나를 만났고, 여왕으로서의 만남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유념토록 하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순순한 어투와는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은 내가 자주 짓는 표정이지만 부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개 공작의 부인이 일국의 공주에게 지을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강국이라는 종교의 신도였지만, 그런 무례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할 만큼 종교를 광신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고, 그래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감정은 정치나 외교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 종종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으나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에는 빈번히 실패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몰상식한 공작부인의 태도에 대한 정당방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감정의 움직임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공작부인이 두서없이 본론을 말했다.

 

 "공주님. 지금은 부인하시지만 공주님은 본국의 여왕이 되실 몸입니다. 왕위에 오르시면 분명 치국에 어려움을 느끼실 테지요.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통치라는 그 막연한 개념은 절로 고개를 젓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국을 통치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더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외교이지요. 내키는 대로 하다가는 강국에게 보복당하거나 약소국에게 반격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지금 저와 미리 교역을 해 봄이 어떠신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사는 나라의 국력은 이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고, 제 남편의 지위 역시 낮지 않습니다. 비록 돈으로 산 지위라고는 하나 절대 얕볼 수 없지요. 그리고 그 지위에 걸맞은 사병 역시 거느리고 있습니다. 공주님께서 조금만 저희에게 투자해 주신다면 본국의 기사들만큼 병력을 모을 수도 있고, 파병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 대가로 세금의 일부를 저희에게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세금은 본국의 백성들로부터 걷는 것이니 공주님께서 절대로 손해 보실 거래는 아니지요. 어떠하십니까?"

 

 공작부인은 야망이라는 대장장이가 만든 장신구들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아주 매혹적인 장신구들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싸구려 모조품인 것들이었다. 왕궁 안에 들어온 잡상인은 나의 기분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잡상인은 이 물건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강매를 하고 있었다. 잡상인의 주의를 돌릴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디저트? 응접실엔 앤이 없었다. 시몬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지금은 디저트를 핑곗거리 삼을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속이 보이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잡상인을 쫓아내야 하지? 공작부인의 제안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척하며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그 어떤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인내심이 없는 그 녀석은 짐을 꾸려 내 머릿속에서 탈출을 한 모양이었다. 그때 이름난 옥리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옥리는 앤과, 앤에게 모든 상황을 들었을 시몬,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새빨간 장미를 품에 든 나의 남편. '그'가 만든 감옥에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장미들은 나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꺾지 말라고 말했는데. 가여운 장미들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생겼지만 그것의 탈출마저 성공시킬 수는 없었다. 공작 부부 앞에서 난 기품 있는 공주여야 했다.

 시몬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음식을 내왔습니다."

 

 문 밖에 준비되어 있던 요리들을 앤과 시몬이 테이블 위에 하나씩 두었다. 휑했던 테이블이 꽉 차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몬이 마지막 음식을 들고 공작의 곁에 다가갔을 때, 그가 빈 접시를 내밀었다.

 

 "마카롱이 정말 맛있던데 더 가져오너라."

 

 공작이 내민 접시에는 부인의 표독한 시선이 올려졌다. 그렇게 먹고도 또 먹을 거냐는 한심함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

 시몬은 접시를 들고 문으로 향하며 나에게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내 추측으로는 '그'에겐 걱정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같은 눈길을 보냈기 때문이다. 주제를 돌릴 빌미를 마련해준 구세주의 등장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훼방꾼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앤의 안내에 따라 내 옆에 앉은 '그'가 훼방 놓지 않을 길을 찾아야 했다.

 마침 테이블 위의 화병이 비어 있었다.

 

 "예쁜 꽃이네요. 이 화병에 꽂으면 정말 잘 어울리겠어요."

 

 그것은 준비의 미흡함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그'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나는 제발, 그가 나에게 어린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간절한 기도는 종종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내 기도가 생각보다 절절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화병보단 너에게 어울리죠, 올카."

 

 은근한 하대는 여전했지만 태도는 놀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앤이 경고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경고를 쉬이 들을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 역시 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란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내 태도 변화가 어떤 파티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구태여 '그'의 파티를 망칠 필요는 없다. 다만, '그'스스로가  망쳐 놓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볼의 온도와 말투.

 

 "자,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그런 꽃은 화병에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려요."

 

 꽃은, 누군가의 관심을 담뿍 받는다면 그 어느 곳에 있어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그곳이 화병이거나, 정원이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꽃 아닌데. 빨간 장미인걸요?"

 "그렇다면 파티장을 꾸미는 데도 손색이 없겠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화병 밖에 둘 곳이 없어요."

 

 '그'는 화병에 넣는다라는 시시한 상식을 제외한 꽃 보관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송이는 내 머리카락에, 남은 다발은 내 품에 두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쉬운 방법을 깨닫지 못한 내 어리석음을 자각할 틈도 없이 '그'가 내게 말해왔다.

 

 "거 봐. 더 잘 어울리잖아요."

 

 '그'는 이제야 '그'다운 면모를 보였다. 나를 보며 짓는 웃음은 오롯한 '그'의 것이었다. 그 웃음은 내 눈길을 피하게 만들었지만, 공작부인의 눈길은 머물게 만들었다. 내가 화끈거리는 볼을 느꼈을 때, 공작부인은 운명을 느낀 것 같았다. 공작부인이 작은 감탄사를 흘리고 나서야 '그'는 부부의 존재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가 인사했다.

 

 "멋진 파티죠? 지금 그대로 즐겨주시면 됩니다."

 "네, 네? 멋대로 무시해놓고 파티라니요?"

 

 공작부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 때문에 아주 잠시 당황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선 투기를 느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공작부인이 아직도 꿈 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인을 깨워야했다. 내가 선택한 자명종은 '그'에게 공작 부부를, 공작 부부에게 '그'를 소개하며 현재 상황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었다. 공작 부인은 황홀경에 빠진 와중에도 개최자인 '그'에게 먼저 소개 됐다는 것에 기분 나빠했다. '그'는 퉁명스러운 공작 부인의 태도엔 아랑곳않고 내가 안고 있던 장미 중 하나를 뽑아 공작 부인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함이라는 요리에 으스댐이라는 소스를 뿌린 공작 부인은 장미를 받으며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이 장미를 받을 때 '그'의 손을 일부러 건드린 것처럼 느껴진 건, 부인이 된 여자의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공작부인과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교하는 '그'의 눈빛은 한순간 공작부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역시 어린이에게 더 잘 어울리네요."

 

 공작부인은 그 말에 드디어 나이에 맞는 얼굴을 드러내었다. 당신의 부인과 나의 남편이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쑥스러움이 그것이었다.

 공작부인은 이 응접실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어렸다. 많이 보아도 10대 후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나이였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비교 끝에 내놓은 결론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을 터였다. 한 남자 때문에 두 명의 여자가 얼굴을 붉히자, 늙은 공작은 그 분위기가 언짢았던 것인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공작에게 눈치를 주었다.

 

 "음식이 정말 맛있지 않나요? 조금 더 드세요."

 

 공작 부인은 실제로 음식에 입을 대지도 않았다.

 

 "흠흠. 나는 그러고 있었네, 나의 사랑스러운 부인. 그래. 나의 부인이지."

 

 벼락 지위를 얻은 늙은 공작이 부인의 허리를 적나라하게 휘어잡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공작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도대체 이것이 공주의 응접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인가. 대체 그들은 어떤 지위에서부터 공작으로 올라왔기에 기본적인 예의조차 습득하지 못했는가. 나는 공작 부부가 만들어낸 이 모든 상황을 증오했다. 그나마 내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공작부인의 치기 어린 제안이 끊긴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뜨거운 질투심으로 공작 부인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폭약으로는 내 인내심이 사용됐다.

공작부인은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가쁜 웃음을 짓는 공작에게 질린다는 표정을 잠깐 내비치더니 이내 호호 웃으며 교묘하게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죠. 저와 거래를…."

"파티 용품에 대한 거래군요?"

 

 내가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단 하나의 이유를 잃어갈 무렵에,  '그'가 갑자기 파티에 대한 장황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이 열었던 파티, 자신이 참가했던 파티, 각 나라의 군주들이 뜻을 모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준 파티…. 본 주제에 전혀 맞지 않는 말만 하는 '그'였지만, 늙은 공작에게 지쳤던 공작부인의 눈에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차있는 남자로 비쳤나 보다. 언젠가 내가 '그'를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공작부인이 다시 어린 소녀가 되자 공작이 또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공작부인은 아무런 눈치도 주지 못했다. 남편이 아닌 실없는 남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공작 부인은 결국 공작을 역정케 했다.

 늙은 공작이 약이 잔뜩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합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주십시오, 공주님! 제 어린 부인이 뭣도 모르고 저지른 어리석은 만남입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혹여 다음에라도 이런 비밀스러운 만남은 삼가 주었으면 합니다."

 "예. 결단코 그럴 일이 없도록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갑시다, 부인!"

 

 공작은 내가 지금까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해주었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공작부인의 손목을 채갔다. 연설자에게 뜨거운 눈빛을 던진 공작은 성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서 부인을 끌고 나갔다. 하나뿐인 청중은 끌려 나가는 순간까지 연설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배가 테이블에 부딪혀 찻잔이 쓰러지는 우스운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연설자는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고, 나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끝내 예의를 보여주지 않았던 공작 부부가 나가자 이번엔 부부의 말싸움이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저따위 미친놈한테 정신이 팔렸나? 그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편 앞에서 저 하찮은 남자에게 넋을 놓은 것이냔 말이다!

 난 그의 꿈에 관심을 가졌던 것뿐이에요. 늙은 노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넌 정말 나의 돈과 명예를 보고 만난 것이로구나! 우린 서로에게 딱 그만큼만 바라기로 했지만, 오늘의 네 행동은 정말이지 참기 힘들구나!

 당신에게 돈은 있어요. 그렇지만 명예는 대체 어디 있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보다 기사가 가지고 있는 명예가 훨씬 크겠어요.

 오냐, 말 잘했구나. 기사라고 했나? 집안 종들이 쑥덕거리더구나. 네가 어떤 젊은 기사와 밀애를….

 

 노크 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던 난 큰 한숨을 쉬었다. 다가와 테이블을 치우던 앤은, 힘들어 보인다며 따듯한 차를 내오겠다고 했다. 마침 응접실로 들어온 시몬은 우리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손에 든 요리를 채 테이블에 올려놓지 못하고 앤과 함께 나가게 되었다. 주변의 소리가 정리되자 급격한 짜증이 내 얼굴을 정복했다. 짜증은 내 미간과 입꼬리 등을 찌푸렸다. 아직 내 품에 있던 장미들은 짜증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러기엔 장미들이 너무 약했다. 승리의 기쁨에 젖은 짜증은 내 입술을 움직이려 했는데, 그 어떤 말도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난 나의 구세주이자 훼방꾼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장미를 꺾어온 것에 대한 분노나, 공작부인을 대하는 태도에 불만이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대한 의심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문장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쩔 때는 입술보다 눈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난 그 모든 질문을 눈동자에 담았다.

 내 눈빛의 답이 되어 돌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깊은 입맞춤―




2016/03/04/금요일

개올카 400일 축하해!! 전에 1주년 때 아무것도 못 챙겨줘서 마음 한 구석이 찔렸는데 지금 몰아서 하게 된 거 같다; 특이한 상황이기도 하고, 순전히 내 생각만 가득해서 원래 개최자 성격도 아니지만…. 원본으로 생각했던 썰보다 내용이 더 어려워진 것 같은데 그래서 쓰는 데 더 오래 걸린 거 같기도 해ㅠ 그래도 기념일이니까 키스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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