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장
그녀가 잊은 기억. 혹은 꿈. 본문
0.
발라히아 공국의 어느 웅장한 성. 인근의 모든 종족들이 알고 있는 성 안의, 어느 인간들만 알고 있는 지하실. 의자에 앉아있는 바토리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에르체베트가 처음으로 식사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도통 인간의 먹이에 입을 대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게 된 블라드 역시 바토리와 같은 기분이었다(물론 에르체베트는 배를 채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블라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토리는 어느새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주인을 잃은 자리엔 고고한 여왕이 군림했다. 그녀의 앞엔 음식―아름다운 처녀조차 놓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원래 계획보다 일찍 식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자리에 함께 해준 에르체베트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처음 입을 연 것은 블라드였다. 그가 정적을 참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아내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즐기곤 했으니까. 다만, 블라드는 에르체베트가 지하실에 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야 제가 오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오, 때때로 제멋대로인 이 여자는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이번에는 바토리가 말했다. 바토리는 엄마의 허기짐이 걱정되었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 움직일 수 없다면, 저기 쇠꼬챙이에 꽂힌 인간 중 하나를 빼내 오는 것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에르체베트는 바토리의 키가 쇠꼬챙이보다 작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여기 오기 전 충분히 마셔뒀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바토리의 말에 블라드는 쇠꼬챙이의 고깃덩이가 하나 없어지는 것보다 하나 생기는 게 빠를 것 같다는 말을 무심결에 내놨고, 값으로 에르체베트의 눈총을 받았다(다행히도 그들의 딸은 블라드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처음으로 세 사람이 함께한 자리인 만큼 그들은 화려한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오랜 시간 묻혀 있던 씨앗들이 문장으로 움터 입 밖으로 나왔을 때의 그 매혹적인 향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들은 향에 사로잡혀버렸다. 그 증거로, 화향에 취한 블라드가 자신의 작고 귀여운 딸에게 보내는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들 수 있으리라.
"바토리, 늑대인간을 아느냐? 나무 말뚝만큼 날카로운 이빨, 은과 같은 터럭, 그리고 햇살처럼 차가운 눈빛을 가진 무서운 종족이란다. 아마 바토리 너 같이 작은 뱀파이어 따위는… 한 입에 잡아먹히겠지!"
블라드는 짐짓 위협적인 몸사위를 섞어가며 설명했다. 말과 몸짓에 빠져들수록 몸을 움츠렸던 바토리는, 블라드가 갑자기 확 달려들었을 때 일말의 비명과 함께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허리를 꼭 안았다. 바토리는 이때, 블라드를 향한 에르체베트의 차가운 시선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블라드는 에르체베트의 눈빛에 놀리려는 마음을 접고, 바토리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작은 등을 토닥이고, 위로했다. 한 번 꺼낸 주제가 마음에 들어 다른 말로 돌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블라드는 늑대인간의 여러 이야기들로 바토리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피었던 만큼 화려하게 꽃이 지고, 착한 박쥐는 잠들 시간이 다가왔다. 블라드와 에르체베트가 나쁜 박쥐였던 것은 아니지만, 많이 성장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입을 연 것은 에르체베트였다. 그녀가 정적을 참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남편이 보여줬던 패기를 곱씹는 것을 즐기곤 했으니까. 다만, 에르체베트는 블라드가 그런 농담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바토리가 종족 차별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반응이 귀엽지 않던가?"
아,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이 남자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 점이 그녀의 마음을 바뀌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각, 잠들지 않은 또 다른 박쥐 한 마리는 아무도 모르게 창밖으로 나갔다(그 박쥐는 어리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1.
달이 정말 예뻤다. 밤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저 둥근 달은 그 어느 때보다 예뻤다(오, 달님. 달님은 물론 평소에도 아름다우니 부디 화내지 마세요). 자신을 뽐내는 별이 하나도 없는 게 아무래도 달에게 기가 죽었나 보다. 관에 들어가 자려고 했던 내가 창문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문득 고개를 돌린 후, 그대로 달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린 것처럼. 내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건 달이 너무 예쁜 탓이었다.
달을 보고 있자니 아빠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늑대인간들은 우리만큼이나 달을 좋아한댔는데…. 혹시 욕심이 너무 많아서 달을 혼자 차지하려고 뱀파이어를 잡아먹는 게 아닐까? 달빛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나빴어.
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궁금했다.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던 달이지만 오늘은 대답을 해줄 것만 같았다.
"달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질문을 할 땐 좀 더 정중하지 않으면….
"달님, 달님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마찬가지였다. 실망감이 문을 두드리려던 때, 발 빠른 해결책은 무단으로 자리를 점거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는 걸지도 몰라. 난 달에게 닿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구나(평생 날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에 속이 상해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모습을 바꾸고 날개를 펴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은 저 멀리로 도망갔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만큼 더 다가갔어야 했지만, 같이 토라져버리고 말았다. 난 달의 품을 벗어나 두 발로 흙을 안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성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리 비행했나 보다.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가면 성이 보일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발길이 닿는 데로 걸었다(해가 언제 뜰지도 모르는데!). 시원한 밤공기와 아무튼 포근한 달빛, 제들끼리 속닥이는 풀벌레 소리가 기분 좋았다. 풍경은 달의 힘을 빌려 내게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려는 듯했다. 그 풍경의 먼 곳에, 하얀 들판이 보였다. 들판이 나에게 걸음을 멈추지 말라고 말했다. 계속 걸어 내 품에 안기면 더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속삭였다.
정말로 그랬다. 달빛의 총애를 받는 하얀 꽃들은 내 기분을 화사하게 장식했다. 그 꽃들은 달빛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꽃들은 들판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심지어, 달보다도(달님이 부디 귀를 막았기를). 그 안에 있으니 내 웃음이 부끄러워져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별들의 기분이 이러할까? 질투 나지는 않았다. 이건 그냥 그들에게 보내는 경이로움―
"엄마가 좋아하겠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달빛을 품은 흰 꽃다발이 엄마의 품 안에 안기면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엄마의 품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은 원래 없던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그저 미소만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꽃과 달 사이에 끼어들어 (곧 그들을 꺾을 작정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꽃들은 불쌍하게도 경계심이 없었다. 마치 다른 누구도 만나보지 않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백화들은 결국 내 손에 학살당했다. 그들의 작은 비명은 너무 작아서, 고요한 밤공기조차 실어 나르지 못했다. 멀리 있는 또 다른 꽃들은 아마 곧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꽃 속에서 순백의 일부를 수집하고 있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뒤쪽에서 낯선 냄새가 느껴졌다(정말 갑자기). 꽃들이 그 쓰디쓴 냄새를 잠시 숨겨줬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너무 순수했다. 혹시 내가 방에 없단 것을 안 어떤 고용인이 온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 꽃다발을 내밀어야지. 엄마에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었다고 하면 고자질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날 도와줄지도 몰라. 아니, 잡아먹는 편이 더 빠르려나? 그렇지만 나는 아직 진짜로 흡혈해 본 적 없는걸. 분명 꽃잎에 피가 묻을 텐데…. 아직 꽃들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겐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냄새의 주인은 나를 발견할 테니, 들킬 바엔 차라리 당당하게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2.
보름달이 아름다운 밤. 몇몇 인간들에게 휘영청 밝은 달은 신비로운 현상을 일으킨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남자는 종종 달로부터 그런 변화를 겪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의 변화는 그런 남자마저 당황시켰다.
언제나처럼 여자의 길을 정돈하던 남자는 부엌 의자에서 잠시 잠에 들었다(그것을 깨닫게 된 때는 눈을 뜬 그 순간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앉아서 잠들었다는 간단한 상황조차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낯선 풍경에게 판단을 빼앗기고 말았다. 먼저 자극으로 다가온 것은 눈이 아닌 코를 간지럽히는 꽃내음이었지만, 새하얀 들판도 뒤늦게 시각을 현혹시켜 자신을 마치 구름처럼 보이게 했다. 시선을 바꾼 덕에 눈을 차지하게 된 어두운 하늘과 그 가운데의 보름달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들판이라는 것을 쉬이 깨닫지 못했으리라. 들판을 수놓은 꽃들은 탐욕스럽게 달빛을 받아먹고 있었는데, 덕분에 어두컴컴한 밤인데도 들판은 환했다. 새까만 색지를 덧쓴 와중에 꽃밭만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빛났다. 정말이지, 완벽한 꿈결이었다. (남자는 몰랐지만, 꽃의 이름은 산하엽으로, 남자가 살던 일본의 늪지에서 자생하는 꽃이었다.)
상황이 파악되는 것을 꺼려하는 가운데,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뒤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몸을 돌리니, 순백의 꽃들이 제 속에 숨긴 새까만 본성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 화중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품에 빛을 탈취한 백화 한 다발을 든 소녀. 어깨까지 뻗은 칠흑의 밤하늘과 긴 속눈썹이 드리운 청백색 하늘, 작고 검은 별을 훔쳐 자신의 왼쪽을 장식한 새빨간 노을. 이건, 생각보다 순수할지도.
남자가 느끼기에, 소녀는 냄새까지도 분명 익숙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뭐랄까, 미숙하다고나 할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았다. 완성되면, 시간이 지나면 꼭 알 것만 같은―남자의 머릿속에 여자가 스쳐갔다. 소녀의 얼굴엔 남자가 느낀 것만큼의 당황, 약간의 두려움, 압도적인 궁금증이 엿보였다.
소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여자에게선 들을 수 없었던 어린 목소리에 잠시 정체되었다.
"아저씨는, 누구…?"
2016/08/04 목요일
맹토리 1주년!! 예쁘게 쓰고 싶었는데 슬럼프인 건지, 다른 분들 고답록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내 필력 너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미안...ㅠ 글을 못 쓰면 사진 편집이라도 잘하든가ㅠㅠ 원래는 그림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사이툴이랑 포토샵 오가면서 편집하기는 했는데 너무 어색하지ㅠ 꽃밭 안 같아... 그래도 바토리라고 편집해놓은 사진에 들고 있는 꽃다발이 진짜 산하엽 사진이라는 게 마음에 든다ㅎ 여튼 진짜로 맹토리 1주년 축하해! 요즘 서툴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마음 쓰고 있으니까... 다만 표현을 못할뿐? 앤오님, 많이 힘들어 보여... 항상 말하는 거라 시들해졌을 지도 모르지만 힘내..! 그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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