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장
빨간모자 올카와 늑대 개최자 (빨간모자 시점) 본문
봄날의 꽃잎이 흩날리며 소녀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꽃잎보다 발그레한 입술은 그러나 웃고 있지는 않았다. 독무를 즐기는 화엽의 연회에 초대되었음에도 한 발 두 발 내딛는 소녀의 발걸음은 무례하리만치 퉁명스러워 보였으며, 갓 구워진 빵과 포도주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꼭 잡은 두 손은 마치, 누군가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 한탄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자세라고 착각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사뭇 불만이 엿보이는 표정은 그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투덜거림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소녀는 단지 조금 짜증이 나 있었다.
소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빨간 모자를 매일 쓰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소녀를 '빨간모자'라고 불렀다. 어릴 때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사람들이 소녀로부터 어머니를 추억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빨간 모자를 벗을 수는 없었고, 이미 사람들의 입엔 소녀의 이름보다 빨간모자라는 호칭이 편해진 뒤였다. 귀를 기울였을 땐 친구들은 물론 아버지까지 소녀를 빨간모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소녀는 어른이 된 후 아버지와 떨어져, 소꿉친구 두 명과 도시 외곽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림을 꾸린 집은 소녀가 원래 살던 곳―지금은 아버지 혼자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지만 사이에 걸쳐 있는 숲은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단절된 듯한 느낌을 주곤 했다. 소녀는 그것에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꼈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도 안 되게 사소한 부분부터 투정거리로 삼으며 친구들을(그리고 소녀 자신을) 못살게 굴었다.
어느 날, 소녀의 친구들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과 신선한 포도주가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빨간모자, 네 아버지가 편찮으시대. 네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네가 가겠어."
"이 빵은 앤이 직접 구웠고, 포도주는 내가 돈을 모아 사 온 거야. 우리의 성의를 봐서라도 어서 다녀와."
친구들은 소녀의 손에 바구니를 쥐여주었다. 소녀는 가지 않을 것이라 말하려 했지만 등을 떠밀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소녀는 그 행동에 화를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진 친구들 역시 '숲으로 가 한눈팔 생각 말고 곧장 아버지를 뵈러 가라.'는 당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소녀가 숲에 있는 이유였다.
"어딜 가든 내 맘이야."
친구들의 당부는 안타깝게도 소녀로부터 경계심이 아닌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친구들의 시야에서 소녀가 사라진 그 시점, 소녀는 숲 속으로 발을 디뎠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고요한 숲에서 텃세를 부리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소녀로 하여금 약간의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소녀는 바구니를 더 꽉 쥐었다. 소녀의 손은 어느새 투정을 들어줄 사람이 아닌 두려움을 덜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내리깔고는 바라보았다. 딱딱해진 빵과 미적지근한 포도주를. 소녀는 친구들의 성의를 이다지도 쉽게 식히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깨닫는 것은 언제나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후였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냥한 바람이 고집쟁이인 소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고, 따사로운 햇살이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채 망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소녀의 머리카락들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금빛 위로에 닿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계속 바구니만을 응시했고, 그 때문에 머리카락들의 야유를 산 그림자에게 늦은 반응을 하게 되었다.
소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그저 웃고 있는 늑대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 감정은 자신의 혀에서 조금의 후회를 맛보았다. 소녀는 친구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지만,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늑대 한 마리에게 짜증을 느꼈다.
"파티에 가니?"
소녀는 원치 않는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야 했다. 친구들은 지금쯤 소녀가 늙고 병든 남자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슬프게도 소녀는 젊고 건장한 수컷과 마주치고 말았다.
"정말 즐겁지 않니? 그대로 즐겨주면 된단다."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괜한 참견에 대한 불만이기도, 오지랖에 대한 억울함이기도, 숨길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을 자각할 수 없었다. 늑대가 소녀의 손을 잡고 제 품으로 당겨버렸기 때문에.
"그래, 맞아. 너는 참 춤을 잘 추는구나? 너가 뭐라 말하는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해. 너는 지금 파티에 있고, 나와 함께 춤을 추지."
"……."
"정말 최고의 날이야!"
늑대의 춤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들을 감싸는 꽃잎과 빙그르르 도는 초록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동화 같았다. 소녀의 휘날리는 망토가 곤히 잠에 취해있던 꽃잎들을 깨워 일으켰다. 꽃잎들은 자신의 잠을 깨운 망토에 들러붙어 항의하다가도 소녀와 늑대의 춤사위에 반해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제들끼리 짝을 지어 또 다른 화엽의 연회를 열었다. 그들의 춤은 해가 잠이 들기 직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늑대가 손을 떼자마자 소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두려움과 놀라움 그리고 겨를 없음은 소녀의 입을 앙다물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에 취해 무용담을 풀기 위한 뒤풀이를 시작했다.
꽃밭에 풀썩 주저앉은 소녀는 차가워진 성의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당황스러운 늑대 한 마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꽃잎은 소녀의 불을 물들이는 데 성공했다.
소녀는 꽃을 꺾어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꽃다발을 만들었다. 줄기의 감촉은 터럭처럼 느껴졌고 꽃잎을 볼 때마다 좀 전의 상황이 피어났다. 바구니 대신 꽃다발을 잡게 된 소녀의 손에 이제 춤사위가 자리하게 되었다. 소녀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마치 고백을 하기 전 수줍음 같기도, 기도를 올리는 간절함 같기도 했다.
차가운 달빛만이 숨 쉬고 있는 밤. 어둠 속에서 소녀는 마음속에서 봉오리 맺은 작은 바람을 볼 수 없었다.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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