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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장

드디어 해냈다... 첫 번째 그림은 느낌만 봐도 알겠지만 앤오님이 선화 따주셨다.선화 따기 싫어하느라 작업시간이 제법 지체됐다. 각 페어마다 그들에게 맞는 다른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디테일이라는 걸 챙겨봤다. 보정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신발에 공을 들였다. 실제 사진을 보면서 묘사해보려고 노력했다. 역시 무언가에 들이는 품이 줄어들면, 다른 부분에 더 신경 쓸 수 있는 것 같다. 채색법을 바꾸면서 계속 느끼는 점이다. 이제 '하루 안에 끝내기' 보다는 '확실하게 끝내기'에 집중하려고 한다. 평일 동안은 선화를 진행하고, 주말에 채색하는 식. 채색도 다 끝낸 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번 살펴본다. 글을 쓸 때는 당연하다는 듯 초고를 쓰고, 퇴고하고 또 퇴고하고, 완성한 후에도 몇 시간 지난 후에 다시 확인하고 공개했으면서 왜 그림에는 그 방법을 적용하지 않았을까? 아마 학생 때부터 후다닥 그리고 마무리짓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그 '후다닥..

헤더 사이즈 이메레스는 너무 길어서 잘 그리지 않는데, 이건 지드베나로 그려보고 싶었다. 분위기 자체는 마음에 들게 그려졌는데, 베나 외형이 조금 아쉽다. 왜 앤캐는 예쁘게 그려지지 않는걸까. 아니면 예쁘게 그려졌는데, 그냥 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뭐든 어렵지만, 역시 머리카락 묘사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것 같다. 아직까지도 덩어리인 느낌? 바꾸고 있는 채색법에 맞는 묘사법을 찾고 싶다. 근데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전 채색법에서도 못 찾았으니까….

앤오님 요청으로 그린 검은 토끼 해 기념 '흑바니 지드' 원본 트레틀은 살짝 다부진 체격이라 임의로 수정했더니 조금 어색한 것 같다. 마음 같아선 그림을 전부 다시 그리고 싶지만(?) 한 번 그린 그림엔 손을 놓는 주의라... 아마 이대로 놔두지 않을까 싶다. 원래 이런 부드러운 느낌의 채색을 할 때는 수채화 브러쉬를 사용했는데, 이번엔 …뭘 썼더라? 아무튼 다른 브러쉬를 썼다. 가볍게 쓰기 좋은 브러쉬를 찾은 것 같아 조금 기쁘다. 물론 트레틀 자체의 손가락이 예쁘지만, 손가락에서 셰이커 연결되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추가로 토끼 머리띠 끝부분 그라데이션도. 지드는 그릴 때마다 손가락을 신경써야해서 힘들지만, 나름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솜비누가 공인한 섬섬옥수, 가늘게 쭉 뻗은 예쁜 손가락의 소..

0. 너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자신보다도 신경 쓰며 위해주는 따스한 사람. 그 빛에 기대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가끔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네 앞에 다시 서는 그날의 지드 프레이저는 누구보다도 성장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성숙하고 부족함 없는 사람. 그에 맞는 환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 그만큼의 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심지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구걸하며 손을 벌리고 있잖아…. 네가 실망할까 봐, 아직도 제자리를 맴도는 모습에 질려버릴까 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며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너는 분명 성장이 더딘 모습까지 안아줄 거야.’ 오랜만에 마주..
똑딱똑딱.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생일이라는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는 소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프레이저'에 대한 기념일은 흐릿하게 넘겨버리고 만다. 오늘이 생일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도 오스카 딜런, 이 레스토랑의 오너 덕분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네 생일인데, 정말 까먹은 거야?" 걱정스러움 반, 안타까움 반. 적당한 염려와 가벼움이 섞인 말투로 그가 흘러가듯 말을 건넸다. 딜런이 내게만 유독 이런 어투를 쓰는 것도 나를 배려하는 것임을, 그것이 습관으로 굳은 것임을 이제 안다. "덕분에 깨달았네요. ……고맙습니다." 똑같이 흘러가듯 대답하는 나. 일순 놀란 듯한, 조금은 감동한 듯한 눈빛을 보인 그는 다시 가볍게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깜짝 ..
베나, 오랜 시간 너에게 인사를 전하지 못했지. 그 시간만큼의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자칫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또 다른 짐이 될까 조심스러웠거든. 내가 그랬던 것만큼 너도 내 소식이 궁금했을 테지. 우리는 평소처럼 서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더 오래 기다리게 하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는 것을 알아.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할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만, 좀비가 나타나기 전에 나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어. 지하에는 같은 주인이 운영하는 바가 있었고, 내가 '오너'라고 부르던 사람이 바로 그 주인이야. 이름은 '오스카 딜런'. 잠깐 언급했듯 내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다더군. 그 말은 오히려 내 경계심을 키웠고, 그것을..

1. 그거 아니? 모든 신 중에 오직 감정의 신만이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해. 참 이상하지? 감정신인데 말이야!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마침 심심했겠다 내가 특별히 들려줄 테니 잘 들어보렴. 왜 감정의 신이 무감정해야 하는지 말이야. 태초의 감정신은 정말 아름다웠대. 빛나는 은색 머리칼이 얼마나 고운지 선인들이 훔쳐다 은하수에 숨겨놓을 정도였다나 봐. 세상은 그를 사랑했고 그 역시 세상을 사랑하다 못해 미물 하나에까지 애정을 가졌지. 그래서 종종 일을 그르쳤던 모양이야. 너도 알지? 육지 끝자락에 있는 바다 있잖아. 그게 감정신이 처음으로 꽃이 시드는 것을 목격하고 눈물을 펑펑 흘린 탓에 생긴 거래. 대관절 바다가 마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신선의 눈물인 탓이지. 이 일로 엄벌에 처..
벚꽃이 피었다. 그 소식을 알려준 것은 당연하게도 너였다. 들뜬 목소리로 '하루 이틀 정도는 훈련을 빼주지 않겠냐'며 벚꽃놀이를 가지고 나를 살살 꼬드기는 너에게 어떻게 '안 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마음도 없었다. 교육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센터에서 허가하지 않아도 네가 원한다면 기어코 나갈 터였다.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센터에선 난색을 표했다. 지금 좀비는 이미 깬 긴 악몽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여전히 음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피해를 입는 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의 강점이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의 강점은 오로지 너를 생각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주장할 땐 잡다한 것을 두루 아는 것보다 하나를 깊게 아는 것이 유리할 때도 있다. 우리가 각자 최..
0. "매일 내가 먼저 다가갔고, 내가 먼저 안기고 고백했어요. 그런데 지드는요? 왜 나한테 먼저 표현해주지 않나요? 사실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죠? 이런 생각조차… 당신을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요. 이런 거 그만하고 싶어요." 그것은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에게 묻다가, 스스로 답을 찾아내고, 결론을 내리다니. 베나, 너는 정말 영리한 아이야. 나는 그래, 이 급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간의 달콤한 현실에 찾아온 악몽을 나는 인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끔찍한 현실이 다가오는데도, 당장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생각을 좇는 것에 바빴고 그 무엇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나는 아무것도 잡지 못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제 믿을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