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장
그간 있었던 일들. 본문
베나, 오랜 시간 너에게 인사를 전하지 못했지. 그 시간만큼의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자칫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또 다른 짐이 될까 조심스러웠거든.
내가 그랬던 것만큼 너도 내 소식이 궁금했을 테지. 우리는 평소처럼 서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더 오래 기다리게 하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는 것을 알아.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할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만, 좀비가 나타나기 전에 나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어. 지하에는 같은 주인이 운영하는 바가 있었고, 내가 '오너'라고 부르던 사람이 바로 그 주인이야.
이름은 '오스카 딜런'. 잠깐 언급했듯 내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다더군. 그 말은 오히려 내 경계심을 키웠고, 그것을 눈치챈 오너는 자신의 이야기를 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죽어가던 오너를 구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고 그때부터 인연이 닿았대.
두 사람은 종종 문자를 하기도 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며칠 동안 답장이 밀린 적도 있었고 그걸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 가끔은 술집에서 만나 이런저런 회포를 풀기도 했다는 모양이야. 우습지. 아버지는 술이라곤 단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만나는 날이면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곤 해서, 미혼인 오너는 배 아파하기도 했다더군. 조금은 괘씸했지만, 지금 나를 보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도 했지.
오너는 내가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자 서운해하는 눈치였어. 아버지는 우리에게 딜런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거든. 그러다가도, 설명하기 애매한 사이긴 했으니 따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혼자 훌훌 털어내더군.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일주일이 지나도 아버지는 답장하지 않았어. 심지어는 문자를 확인하지도 않았지. 그것을 이상하게 느낀 오너는 아버지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더군.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던 식당 이야기를 자주 꺼냈기 때문에 사는 곳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대.
……내 부모님은 살해당했어.
미안해, 베나. 지금은 이 정도밖에 말할 수 없어. '그날'을 꿈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스스로 떠올리는 것은 너무 버겁고, 입 밖으로 내거나 손끝으로 써 내려가는 것도 순탄치 않아.
너에게 기약 없는 이해만을 바라는 내가 싫어서 변하려고 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너의 이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까.
이야기를 마저 할게.
오너는 이웃들에게서 내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고 하더군. 홀몸이었기에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나 봐. 오히려 한국으로 와 무작정 나를 찾아다니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탄했지. 아버지가 자랑처럼 보여줬던 내 사진들, 그리고 집에서 발견한 가족사진을 얼마나 자주 확인했는지 길거리에서 날 마주쳤을 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대. 그러나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끔찍한 첫 만남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다급히 붙잡아 놓고 한 말이 누가 봐도 수상쩍은 일자리 제안이었으니, 완전히 말아먹었다고 생각하며 절망했었대. 오히려 다른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쉽게 승낙하는 내가 걱정스러웠다나.
오너는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나의 삶을 궁금해했어. 모든 것을 알려줬으니 이제 내 인생에 조금 정도는 참견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것에 동의한 건 아니지만, 난 네 이야기를 시작했어. 걱정하지는 마, 내가 오너의 무엇을 믿고 너의 이야기를 함부로 흘리겠어.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내 곁에 베나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넌 대단한 사람으로 비친 거야.
내게만 대단한 사람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내게 또 다른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았어. 내가 원하는 거리를 오너는 잘 알고 있었지.
다만 그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건넸어. 거의 잊고 지냈었던 트리샤 고모의 연락처…. 어쩌면 오너는 나보다도 더 우리 가족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지. 심지어는 내가 영국으로 돌아간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따를 거라며, 국외보다 국내에서 더 먹히는 사람이라는 농담까지 던졌어.
솔직히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생명의 은인, 그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것 하나 때문에 여태 쌓아 올린 삶을 포기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 ……아니, 이 말은 취소할게. 너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지. 나 역시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소식이 궁금했던 건 아니야. 오너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찾아온 조카를 보살펴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어. 내가 연락을 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트리샤는 매우 안타까운 목소리로, 한국에 정착한 지 오래되어 무작정 떠나기는 힘들 것 같다며 혼자 보내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어. 그러나 내가 원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국으로 갈 테니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덧붙였지.
영국에 가면 네가 있기에 혼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고모의 괜한 걱정을 덜어주지는 않았어. 오너와 이야기하면서 아마 조금은 지쳐있었던 모양이지.
난 보다 나은 모습으로 너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줄 날을 바라고 있어. 이따금 너와 손을 잡고 비 내리는 영국의 거리를 걷는 상상도 해.
그러기 위해선, 알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걸. 오너도 내게 말하더군. '그날'의 일을 되뇌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분명 더 나은 내일을 살 수 있게 해 줄 거라고.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비가 내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너를 떠올리면 모든 악몽에서 금세 깨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아. 너는 나로 하여금 영영 디디지 못했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 그러다 보면 걸을 수도, 언젠가 다시 뛸 수도 있겠지. 가끔은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괜찮아. 네가 나를 일으켜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제 와선 그렇게 빨리 갈 수도 없을 것 같아. 슬프게도 나는 또 너에게 기다림을 요구하고 있어. 그러나, 베나, 부디 내 마음을 알아줘. 너를 위해서 난, 더 이상 과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아.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될게.
오늘도 똑같은, 네가 보고 싶은 수많은 날 중 하나야.
사랑해, 베나.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도 나는 여전히 네 생각을 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