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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없다.

솜비누 2022. 7. 8. 14:16

1.

 

 사랑은 없다.

 한낱 복사본에게 허락될 만한 것이 아니지만, 기회가 생기면 구걸하고 쥐어질 때마다 이번엔 정말 내 것일 거라 착각하며 금방 상하는 사탕을 붙들던 나는, 맛을 느끼기도 전에 빼앗길까 두려워 항상 급하게 깨물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번을 깨물어도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탕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상하지 않을 거라 방심하고 녹여 먹였다. 두꺼운 겉면이 다 녹아내렸을 때 내 혀를 적신 것은 참을 수 없는 신맛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입안에 머금고 있는 미련한 내게 사랑을 말하려거든, 사랑은 없다고 해라.

 

 내가 자신을 즐겁게 해줘서 좋다던 그가 내게 허락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랩스, 그 개만도 못한 새끼에게 빼앗기다 못해 놀아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늘도 그 사람이 보낸 마지막 문자를 확인한다.

 

  『이젠 널 만나는 게 하나도 즐겁지 않아. 새로운 상황에서도 날 재밌게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네. 차단할게. 그만 연락해.』

 

 랩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족 단톡방에 그 사람과 찍은 다정한 사진을 올린다. 나를 조롱하기 위한 자랑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철저하게 의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사진을 확인하고 전해지지 않을 문자를 보내다가 끝없는 자기비하의 늪에 빠지는 나날을 반복했다.

 내가 너무 나 자신을 생각하는 데 급급해서 그가 떠나간 것은 아닐까? 심지어 나의 비정상적인 집착까지 받아주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말대로 내가 그 새끼보다 즐겁게 해주지 못했기에 떠난 거겠지. 그래, 맞아. 난…….

 어느 때보다 처절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빨간 옷을 입은 환자만 봐도 울화가 치밀어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다. 그래도 다른 이별들처럼 이 끔찍함도 결국엔 잠잠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의료 사고를 낼 뻔하기 전까지는.

 아주 다행히도 그 환자는 같은 증상으로 종종 입원하곤 했었고, 이상함을 느낀 간호사가 실제 약을 처방하기 이전에 확인차 내게 질문을 해줬기에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간호사는 나를 걱정하며 나 자신을 위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을 권유했다. 난 환자들을 위해 사표를 썼다. 그 소식이 들리자 간호사는 당황한 듯했다. 자신의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 의지로 결정한 것이니 마음 쓸 것 없다고 타일렀다.




 사실은 당장 랩스로부터, 그 사람과의 추억이 가득한 이 도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닷새 후 출국하는 유럽 10박 12일 패키지여행을 예약하고, 당일까지도 눈코 뜰 새 없이 준비한 끝에 새벽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빡빡한 일정은 후유증을 잊게 하는 듯싶었지만 장엄한 풍경 위엔 언제나 그 사람이 덧씌워져 나를 힘들게 했다.

 

 귀국 후엔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새로 살 곳을 찾아다녔다. 여독도 풀지 못한 고된 몸은 좌석에 앉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괴롭지만 괴롭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둘러보지 않고 바로 다음 마을로 갔고, 괜찮아 보이면 그 자리에서 숙박업소를 예약한 후 세세히 살펴보다가 아침 일찍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는 일정이 계속되었다. 수제 향수 가게가 있는 이 마을은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해줄 곳이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 여유로워도 되지 않을까? 피로도가 한계치에 이르렀기에 든 생각이었다. 숙소를 찾자마자 난 마을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어둑한 밤이었다. 이런 작은 마을의 밤은 너무도 고요해서 숙소를 나온 것을 후회하게 했다. 마음만큼 무거워진 발걸음이 벤치에 도착했다. 그곳에 앉아 별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람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린 신부님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난 또다시 늪에 잠겼을 것이다.

 어린 신부는 외지인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궁금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저 말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왔건, 진심으로 성심성의껏 답하고 싶었다. 평소처럼 거짓으로 대했다간 빈 구멍에 들어찰 생각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여러 마을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 마을의 장점이나, 추천할만한 점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신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은 그의 걱정처럼 어느 마을의 누구에게 물어도 들었을 법한 것이었다. 

 

 "너무 흔한 대답을 드릴 것 같아 고민입니다. 마을의 장점이라면, 작기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걸까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아, 추천해 드리고 싶은 거라면 해가 져 바람이 서늘할 땐 우리 교회 뒤편에 있는 풀꽃 밭이 쉬기 좋습니다. 나무도 몇 그루 있고, 인적이 드물어 방해도 없으니 나중에 한 번 놀러 오세요."

 "나중에라…. 신부님은 제가 여기 살기를 바라십니까?"

 

 몸이 피곤하긴 했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은 나까지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금세 작게 손사래 치며 실없는 소리였다며 신부를 안심시키곤 좋은 말씀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숙소에 돌아가 남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살피니 정착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같았다. 의료기관이 있는 한적하지만 편의시설이 보장된 곳이었는데, 무엇보다 랩스가 있는 곳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원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마을 간의 상황을 비교하며 신중하게 정하려 했으나, 몸이 피곤해지니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다른 마을도 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못한 수준이었으니 돌아가서 비교한들 소용없을 거라는 게 혹사당한 뇌의 의견이었다. 거의 모든 기관이 파업을 선포하기 직전에 이르러, 집을 구하는 기준이 현저히 낮아졌다. 다행히 당장 입주 가능한 매물이 많이 없었기에 중개업자와 두세 집을 구경하곤 계약을 마쳤다.

 곧바로 마을의 큰 병원에 들어가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는 간호사에게, 전에 근무했던 병원이 유명하다는 점에 감사하며 명함을 건넸다. 다짜고짜 찾아와 원장님께 '의사가 필요하다면 자신을 채용해달라'는 말을 전해달라던 남자는 간호사의 입장에서 참 난감했을 것이다.

 내가 난감하게 한 사람은 더 있었다. 바로 집주인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틈타, 용달 이사와 사흘 후 계획을 잡았다는 내용을 전하자 그런 건 적어도 한 달 전에 미리 얘기해주셨어야 한다며 곤란을 표했다. 두 달 동안, 필요하다면 몇 달 더 집세를 낼 수도 있으니 양해해달라고 하자 그는 떨떠름해 하며 승낙했다.

 

 

 

 몇 주 동안 이사를 하느라, 가구를 주문하고 들이느라, 생필품 등을 구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시간이 생기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파도쳤다. 집 청소까지 마친 날엔 더욱 그랬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직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나흘 뒤 면접을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원장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슬슬 일자리를 알아보려던 참이었던 내게는 무척 의외의 연락이 아닐 수 없었다.

 면접 날 원장에게 들은 말은 이러했다.

 사고를 친 것도 발령이 난 것도 아닌데 큰 병원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이런 동네 작은 의원까지 전전하게 된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소요되었는데도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우리 의원은 확장할 계획에 있다. 공사에 앞서 무슨 과를 개설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마스트 당신의 명함을 받았다. 당신이 이곳에서 일해준다면 우리로선 좋겠지만,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만큼의 환경과 보수를 제공해 줄 수 없으며, 공사를 위한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되어 현재 정형외과가 없는 우리로선 즉시 일자리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그런데도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당장 연봉은 크게 상관없었을 뿐더러, 제시한 금액이 물론 전에 받던 것보다는 적었으나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2. 

 

 이번에 처방된 시간이라는 약은 너무 쓰고 독했지만 그만큼 효과는 좋았다. 랩스도 결국 사탕에 흥미를 잃었고, 일에 빠져 사는 것 역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밤늦은 시간 퇴근을 하면 집에 가기 전에 이따금 성당 쉼터에 앉아 머리를 식히곤 했다. 그럴 때면 보통 어린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머리를 식히는 것을 도와줬고 심지어는 기다려지기도 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고쳐줄 의사를 만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고, 성직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그를 보고 싶은 마음과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분명한 위험신호였다.

 소인이 굳을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성당에 들렀다. 하늘에게 새해 기도를 드리거나, 차디찬 벤치에서 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을 보기 위해서라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내게 그는 작은 새해 선물이라며 성경을 건네주었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다음 주일까지 그가 추천한 시편을 다 읽어오겠다고 말했다. 답례라는 빌미로 그를 또 찾아오기 위함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신부였다. 마을을 추천해줄 때와는 사뭇 다른 상큼한 미소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참…, 시편이 성경의 반을 차지할 줄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 신부에게 미움을 산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이제야 알게 된 그의 이름을 되뇌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름이 화국이었지."

 

 성경에서도 그의 꽃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 향에 심취한 것인지 11시 30분을 넘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성경에서 눈을 떼고 밖을 나설 수 있었으나, 여전히 옅은 국화 향기가 느껴졌다.

 그에게 단단히 빠졌구나.

 

 "또 밤에 만나네요, 그렇죠?"

 

 갑자기 말을 건 그가 신부복을 입고 있었다면 나는 내 뺨이라도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상복을 입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 화국… 신부님. 병원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신부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말했지만 내게 허락된 것은 얼마만큼의 편함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주춤한 사이 신부의 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에 그가 이곳에 방문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차라리 숙제 검사를 하러 온 것이기를 바랐다.

 

 "제가 환자였다면, 아픈 것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만난 것도 인연일 터. 제가 추천해준 시편은 어떠셨나요?"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다윗의 시. …정확히 어떤 부분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시편 103편 15절이네요.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이것은 다음 구절."

 

 신부는 내게 사흘 동안 그만큼 읽은 것이 대단하다며 다 읽지 못했다고 꾸짖을 생각은 없지만, 다 읽을 수 있다면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뜻깊은 물건을 준다고 했다. 신부란 원래 그런 것일까. 친하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뜻깊은 것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인 걸까. 그의 선물은 내 학구열을 불태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특별해서 주는 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두 사람, 무신론자와 신자가 만났기 때문인지 이야기는 삽시간에 일에 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가 자신의 옷을 걸쳤을 때, 각자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잇기로 했다.

 

 "그럼 지금은 신부님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야 하나."

 

 욕심으로 얼룩졌기에 흘렸던 말을 신부가 붙잡아주었다.

 

 "지금부터라도 괜찮으니 편하게 불러요. 좋은 밤 보내요, 마스트."

 "되도록 의사 선생님은 안 보는 게 좋아요." 발걸음을 옮긴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러죠, 화국."




 시편은 다 읽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일에 치여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성당을 찾았다. 그런데도 신부는 내게 품 안의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날짜가 지났지만 형제님께서는 다 읽으셨다며 이곳에 오셨죠. 저는 형제님의 양심을 믿고서 선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거짓이었다 한들 그것은 마리아께서 결정하실 일이겠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화국께서는 저를 마스트라 부르지 않으시나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에겐 형제님이라 불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마스트가 아닌 이름으로, 다른 호칭으로 불리고 싶었다.

 

 "형…, 아니 마스트 씨께는 이 호칭이 어색할 수도 불편하실 수도 있었겠네요. 저 또한 마스트로 부르면 친근해서 좋으니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화국에게 쉬는 시간이고 싶어서요."

 "후후, 반가운 소리네요. 마스트는 정말 친절한 것 같아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신부에게 쉬는 시간을 마련해주다니 말이에요."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 자체도 예상외의 에너지를 쏟는 일인걸요. 그 점에서, 전 전혀 화국을 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그런가요. 늘 많은 사람을 맞이하여 그 부분은 잘 모르겠으나, 자주 오신다는 것은 좋은 일이네요."

 

 예상외의 에너지를 쏟는 일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린 신부님이라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당신이 나의 쉬는 시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남을 만나는 것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그러나 당신을 만나는 것이라면, 우연이라도 더 길게 잡아두고 싶었다.

 지금처럼, 내가 찾아도 되는 음식점의 위치를 물어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모자라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유도하게 된다.

 

 "그럴까요? 화국 씨가 혼자 나왔다면, 좋아요. 저는 혼자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운이 좋았네요. 혼자 있는 마스트 씨를 만나다니. 그것도 저 혼자서."

 "웬일로 밖에 나와 밥을 먹고 싶었는데, 화국 씨를 만나려고 그런 기분이 들었나 보네요. 뒤따라가겠습니다. 아니, 남처럼 보일 것 같으니 옆에서 걸을까요?"

 "신기하네요. 인연이라고 봐도 괜찮겠지요? 같이 식사하러 가는 것이고, 마스트 씨는 저와 몇 번 본 사이니 좀 더 친근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걸요."

 

 남처럼 보이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신부와 나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남이니까. 그렇지만 노란색 간판의 오믈렛 가게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의 옆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맛집이 더 있다면 종종 저와 같이 가요. 화국과 함께라면 더 맛있을 테죠?"

 "그럼 저와 더욱 자주 봐야겠는걸요? 그리고 저도 주변 식당을 자주 다녀봐야겠어요."

 

 잠시 생각하던 신부가 물었다. 나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기를 바랐다.

 

 "제가 영화 신청을 한다면 받아주실 수 있는 건가요?"

 "제가 보여드려야죠. 오랜만에 좋은 경험을 선물해주셨으니."

 

 그러나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카페였다. 당장 영화를 볼 시간이 되지 않으니 우선 음료라도 사겠다는 게 내가 내세운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그와의 시간을 늘리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카페 옆엔 향수 가게가 있었다.

 

 "화국은 원래 향기가 나니 향수가 필요 없겠네요."

 "국화이니까요. 국화 향기를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

 "좋아합니다."

 "…다행이네요. 다음에 국화향 항수가 있다면 하나 선물해드릴게요."

 

 원래부터 좋아하던 향은 아니다. 신부가 풍기는―봄 같아서 같이 있으면 괜스레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그 향이 좋았다. 내 몸에서 국화 향이 난다면, 꼭 당신 같은 향수가 아니라 당신이길 바란다고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을까.







3.

 

 일이 바빠 미루고 미뤄졌던 회식이 마련되었다. 그들은 제대로 반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회식 같은 건 영영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주량을 핑계로―그래, 마냥 핑계라고는 할 수 없지.―잔 부딪히는 소리만 우렁차게 내며 고양이 세수하듯 입을 적셨다. 그러길 십수 번 드디어 자리가 끝났고, 나는 조용히 일행과 헤어졌다.

 오늘은 특히나 어린 신부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도 술을 마셨다고 걸어가는 내내 랩스 욕을 지껄이긴 했지만 말이다. 쉼터에 다다르니 나보다 먼저 자리를 잡은 신부가 보였다. 상황 파악이 빠른 입은 저절로 욕을 그만뒀지만, 몸뚱이는 분함에 눈이 팔려 여전히 떨고 있었다. 술 냄새를 풍기다 못해 벌벌 떨기까지 하는 나이 많은 의사라니. 차라리 2차에 따라가 모두의 앞에서 음식을 게워내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우리는 내 상태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해주실 겁니까?"

 "제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자격은 없을 것 같아요. 상대가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충분한 거겠죠. 응원의 기도 정도는 해드릴 수 있겠네요."

 

 당신을 보자마자 깨버린 취기나 누군가에게 보내는 당신의 응원에 용기가 생긴 것은 아니다.

 처음엔 그저 말이 잘 통하는 한 명의 성직자를 대하는 것에 그쳤다. 그런데 왜 당신을 마주할수록 내 마음에 꽃이 피어나는 걸까.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친근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말마저 나에겐 달콤했다. 어리석은 나는 또 사탕을 쥐려 허공에 손을 휘적이고 있었다.

 

 "신부님."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뱉어낸 한탄이었다. 그 속에 나를 깨부술 희망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아니, 화국."

 

 휘영청 노란 달에 당신의 꽃잎이 물들었다.

 

 "나랑 1년만 사귀어줄래요?"

 

 정말 사랑은 없을까?




2019.08.09

사랑이 없긴 왜 없어!!!!! 어 여기 있잖아??? 어 화국이가 여기 있잖아ㅠㅠㅠㅠ 하 그래도 고록이라고 달달한 내용 담고 싶었는데 달달함은 대체 어디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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