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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눈은 초록눈을 생각했다

솜비누 2022. 7. 8. 14:18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과자들의 수다를 엿듣고 있는 모자장수는 영원히 계속될 자신의 시간에 만족하기로 했다. 도화지에 홍차를 엎은 신의 변명으로 탄생한 노을이라는 명작을 보거나 선선한 바람 속에서 지루함을 찾아내는 것이 그는 익숙했다. 자신이 뛰어난 숨바꼭질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지루함은 모자장수가 자신을 찾아낼 때마다 그의 소소한 재밋거리를 숨기는 보복을 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모자장수의 수고를 덜어줄 말벗이 있었다. 그러나 찻주전자는 그들을 방해하기 위해 침묵이라는 독약을 찻잔에 따랐고 모자장수를 배신한 찻잎과 꽃잎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범죄현장을 장악했던 여유가 허무로 옷을 갈아입자 슬픈 표정을 짓게 된 모자장수와는 달리 다구들은 지금의 고요에 잔뜩 긴장했으며 한참 뒤에야 자신들이 그것을 체포한 목소리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닥을 향해 갈색 귀를 늘어뜨린 작은 토끼에게 어떤 권유를 했다. 두 개의 다른 구슬에 똑같은 순수함을 담은 작은 토끼는 그 반짝이는 눈빛으로 권유를 수용했다. 

 

 "응! 모자느은 차가 필요하니까아~!!"

 

 모자장수는 흔쾌히 심부름꾼이 되어준 갈색 토끼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뒤집었다.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모자 속 무한한 공간에서 간단히 포장된 체크무늬 과자를 찾아내어 작은 토끼에게 건네주었다. 과자 봉투를 주머니에 넣은 심부름꾼은 모자장수를 위해 환한 웃음을 남겨두고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체셔고양이나 만들 수 있을법한 상황에서, 모자장수는 자신이 아까와 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음을 알았다. 작은 심부름꾼은 웃음을 남겨두었지만, 그것은 보물상자의 열쇠가 되지 못했다.

 모자장수에게 동정심을 느낀 지루함이 다른 상자를 내놓았다. 상자에는 꽃밭, 알약, 찻잎, 수면제, 다과회, 비밀… 따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지루함이 자신이 베푼 자비로움에 취해 있는 동안, 모자장수는 상자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애벌레. 꽃밭에 사는 애벌레. 수면제라고 불리는 알약으로 비밀스러운 다과회를 열어줬던 꽃밭에 사는 애벌레.

 지루함의 자비로 태어난 애벌레가 다과회장을 맴돌았다. 모자장수는 작은 심부름꾼을 걱정했다. 모자장수의 부탁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것을 아는 애벌레가 제때에 찾아온 것일까? 하나뿐인 동석자를 심부름꾼으로 탈바꿈시키니 다른 이가 찾아왔다.

 

 "…무례가 될지도."

 

 체포된 고요가 탈주하려 하자 목소리는 낮은 경고를 웅얼거렸다. 모자장수는 심부름꾼의 단순함을 믿지만, 작은 토끼의 쾌활함이 그에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록눈은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다. 아니, 조용하다 못해 모두에게는 정말로 과묵한 사람이다. 모자장수는 작은 토끼가 오히려 그를 재밌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꽃들의 수다에 지친 초록눈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모자장수의 입꼬리가 잠시나마 올라갔다. 다과회장을 방문한 애벌레는 작은 토끼가 두고 간 환한 웃음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자장수는 따라 밝게 웃었다.

 모자장수는 그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가 꽃들의 소란에 질려 다과회에 찾아온 것인지, 누군가의 명령으로 꽃밭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인지, 이 나라 유일의 찻잎장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길을 잊어버려 다과회에 오지 못하는 것인지 않는 것인지. 모자장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비밀을 약속했다는 것만을 알았다. 애벌레와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누구지? 그 사람은 하얀 눈을 가졌어. 아아, 그 사람은 모두가 탐내는 재료를 가지게 되겠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모자장수는 자신이 그 비밀스러운 약속을 알고 있다고 장담하였다.

 

 초록눈은 언젠가 죽음과 함께 하얀 눈이 탐냈던 사탕 중 하나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하얀 눈은 언젠가 탈출과 함께 근사한 무지개 가죽 모자를 선물해주기로 했다. 서로의 약속이 교차된 날부터 꼭짓점을 찾지 못한 지금까지 하얀눈은 자신이 초록색 사탕이 장식된 무지개 모자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에게 영원히 다과회장에 있으라고 말한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인데도 자신은 절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고 하얀눈은 슬프게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얀 눈은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식물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인데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얀눈은 자신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초록눈이 없으면 빨간 장미꽃이 피지 않는 다과회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더이상 수다스러운 차를 마실 수 없기 때문인지 하얀눈은 알지 못했다. 그저 초록눈을 생각했다.

 초록눈은 친절하다. 자신에게 잠을 선물해주고 그 면죄부를 만들어줄 만큼. 이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인가. 하얀눈은 초록눈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늘 그에게 고마워하지만, 그 표현을 오직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작은 토끼를 통해서만 전달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모자장수는 왠지 하얀 눈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각각의 생각들이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한꺼번에 아우성치는 바람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모자장수는 작게 웃음 지으며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야만 질투심에 시달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시 한번 작은 토끼가 떠나간 길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찻주전자를 물로 채워 차를 탈 준비를 했다.

 매드 해터는 항상 다과회에 있어야 하니까.




     ♠언젠가 여길 벗어날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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