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장

노름의 끝 본문

글/발신

노름의 끝

솜비누 2022. 7. 8. 14:21

 "그건 사랑이 아니야."

 

 절대자가 말했다.

 나로 하여금 목숨을 갖게 한 주인이자 지옥의 왕이 말했다. 그의 입에선 언제나 틀림없고 완전한 문장이 흐르기에 광신도처럼 모든 음운을 믿고 따랐다. 미천한 몸뚱이를 보이고 있노라면 불티같은 의심도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죽어 재가 되는 것이다.

 

.

.

.

 

 몹시 신성한 인물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던가. 거리는 온통 붉고 푸른 장식들로 소란스럽고 종소리와 노랫소리가 마음에 일렁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들뜬 표정을 하며 행복으로 걸어간다.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물론 이러한 풍경에서 동떨어진 사람들이다. 즐거움이 가득한 장소에는 얼굴조차 내비칠 수 없는 자들의 음울함이 신경을 자극한다.

 혹자는 이런 날이야말로 적은 이간질로도 엄청난 장난을 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이는 제대로 된 장난을 치지 못하는 잔챙이들이나 이런 날을 노리는 거라고 했다.

 아무렴. 오늘이 무슨 날이든 나와는 상관없지 않은가.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바로 당신이건만, 오늘의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동안 즐거웠다. 그대, 나의 반려여."

 

 이렇게나 아쉬운 울림을 가진 단어들의 집합.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모방하지 못한 초라한 문장.

 당신의 앞에선 지옥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로운 척했으나 난 역시 주인의 관심으로 살아가는 한 마리의 평범한 개일뿐이었다. 모든 것을 이끄는 양 행동해도 목줄은 당신이 쥐고 있었어. 난 그런 존재로 태어난 거야. 누군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조차 떼지 못하도록.

 나에게는 당신을 위해 세상을 적으로 돌릴 기개도 심지어 주인을 등질 자신도 없는데 이런 조촐한 마음에 어찌 감히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 * *

 

 나의 주인은 사랑을 각별히 아끼고 특별히 여겨 모두가 그 벅참을 느끼기를 원한다. '사랑'을 입에 올리는 것은 황홀경에 빠지고 싶다는 뜻. 그 열의가 기특하니 어찌 응답하지 않으랴. 당신께서 직접 겪은 아름다운 일을 친히 말로써 베푸시는 것을 듣는다. 아아, 지옥은 그 지배자를 닮아 이리도 뜨겁게 불타오르는구나.

불꽃의 근원에 자긍심마저 느낄 때,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 사랑일까?'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게 간지럽고, 보지 않을 때도 안부가 궁금해요.

 그건 장난의 단맛을 깨달은 어린 악마의 마음과 다르지 않구나.

 

  '그게 정말 사랑일까?'

 

 그를 속일 때마다 기쁨이 샘솟아야 할 텐데 내 본성을 감추는 것 같아 탐탁지 않아요.

 넌 나와 같이 완전한 존재도 아니잖아. 뭐든 처음은 어색한 법이지.

 

  '그게 정말 사랑일까?'

 

 주인께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 같아요. 이것도 충성심일까요?

 글쎄. 그건 너만이 알 수 있지. 한번 잘 생각해봐.

 

  '그건 사랑이니?'

  '…….'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니야.

 

* * *

 

 이런, 처음 겪은 놀이가 즐거워 그만 심취하고 말았군.

 하지만 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난 이겼고―어쩌면 비겼다고 해야겠지― 그에게 칭찬 받을 수 있을 거야.

 

 오늘 이후에도 당신 생각이 날까?

 그렇겠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으나, 어엿한 노름꾼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첫 내기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거둔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평생 기억하며 '내가 바로 동양의 문지기와 내기하여 이긴 자'라며 두고두고 허세나 부릴 것이다.

 내게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은 단지 그뿐이니, 당신은 혹여라도 이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말기를. 어느 날 문득 추억에 빠져 나와 함께 걷던 길을 걷지 말기를. 차를 마시다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를 떠올리지 말기를.

 그럼에도 하나 바랄 수 있다면, 이 놀이를 정말 즐거웠다고 기억하기를.

 

 ……그래. 이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지. 당신의 말처럼 노름에 너무 빠지면 끝이 안 좋은 법이니.

 

.

.

.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날, 반갑다 꼬리 흔들더라도 언행이 가볍다며 멀리하지 말아줘.

' > 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정말 못난 사람이야.  (0) 2022.09.12
나의 생일  (0) 2022.07.08
그간 있었던 일들.  (0) 2022.07.08
하얀눈은 초록눈을 생각했다  (0) 2022.07.08
사랑이 있다면….  (0) 2022.07.0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