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장
나쁜 사람을 만났다. 본문
0.
어릴 때부터 확신했다. 만약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커다란 종 아래에 서게 된다면 내 옆에 있을 사람은 '테오' 같을 거라고. 안기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보드라운 머리칼이 아름답고 포근한 피부 위 떠오른 웃음이 귀여운 사람. 달콤한 목소리로 영원을 속삭이는 너는 분명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 변태야?"
이곳을 떠날 방법을 찾아 종일 밖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온 나는 몹시 짜증이 났다. 어떻게 시종도 마차도,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지?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를 이 연회장에 구속하려는 게 틀림없다. 죄목은 너무 뻔해 입에 올리기도 싫을 지경이다. 물론 순순히 따를 내가 아니었기에 국왕은 거짓으로 꾀어 스스로 감옥에 당도케 했다. 하! 명분도 좋지. 친목회 겸 외교 연습이라니. 앤과 시몬의 동행을 불허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무슨 마음이 동해서 참석하겠다고 했는지, 귀신에 쓰였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타국 사람과 만난다고 한껏 차려입은 옷은 바닥에 끌려 흙투성이가 된 지 오래다. 마침 주변에 있던 나이프를 더러워진 치맛단에 가져다 댔다. 정든 친구와 떠나기 싫었던 밑단은 손을 꼭 잡고 놔주지 않다가 계속되는 무력행사에 결국 굴복했다. 그것이 안쓰러웠는지 누군가 따듯한 손길을 내밀었고 밑단이었던 것은 너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나 금방 다른 사람에게 붙다니. 내가 버렸으나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것이 내가 표정을 찡그리며 네게 쏘아붙인 이유다.
너는 아마도 습관적으로 긍정한 것 같다. '네'라고 말하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바닥 청소 중이라고 대답하는 걸 보니 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라면 넘어갔겠지만, 기어코 꼬투리를 잡아 변태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냐 물었다. 너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변태하죠, 뭐~"
내가 원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빈틈을 찾았다. 그것은 허술한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보다도 쉽게 발견되었다. 청소 중이라더니 도구는 어디 있지? 너도 쉽게 대답했다. 방금 주운 치맛단을 걸레로 쓰고 있다고. 컵까지 주웠다며, 퍽 자랑스러운지 나에게 보여주었다.
"…너 변태에다 거지인 거지?"
거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옷차림을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다시 트집을 잡았다. 너는 피식 웃으며 나의 화를 돋웠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것은 네가 자신을 '개최자'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오호라, 이 불친절한 연회를 연 장본인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단 말이지? 너에게 분풀이할 작정으로 이곳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너는 가만히 듣다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글쎄요. 올카 공주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보면 몰라? 눈치도 없다니."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너는 또 어깨를 들먹였다. 난 네 건방진 태도에 대한 사과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팔짱을 끼며 의견을 피력하니 넌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다.
"내가 듣고 싶으니까."
"저런, 살면서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으시군요."
시종, 집사, 하녀, 요리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게 사과를 했는지 네가 알기 쉽도록 친절히 말해주었다. 아니, 어쩌면 휘말린 걸까?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그들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대뜸 물었다.
"제가 사과한다면 기억하실 건가요?"
"그래 주길 바라?"
"공주가 기억해주신다면 영광이겠죠."
"그런 마음가짐은 좋네. 그래, 기억해주지."
"그렇다면… 저의 대답은."
너는 끝까지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싫어요."
이곳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죄수가 많았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오게 된 걸까? 많은 나라에서 모였으니 그만큼 다양한 죄를 가지고 왔으려나? 그러나 모두 귀한 손님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고귀한 핏줄을 자랑하거나 모국을 칭송하기보단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황을 한탄하는 것을 택했다. 난 무엇도 고르지 않았다. 자국민과도 말이 통하지 않는데 타국인과 무슨 공감대를 형성하며 노닥거리겠어. 아, 딱 하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할 주제를 꼽자면 바로 '개최자'를 들 수 있겠다. 너는 일곱 집권자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꼭두각시인 듯했다.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죄인일 가능성도 있다. 확실한 것은 네가 아랫사람임에도 상당히 예의 없이 군다는 것이다. 꼴이 우습게 되었으나 모두는 군주의 자손이며 그에 따른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지사. 허나, 너는 임금의 명을 받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뻗대었다. 무례한 개최자라는 칭호가 마음에 든다더니 귀빈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하대하거나 궤변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연회는 언제나 즐거우니 계속될 거라고 말하는 너는, 너를 제외한 누구 하나 즐겁게 하지 못했다. 아무도 시종의 이름 따위 궁금해하지 않았겠지만 제대로 밝히는 법 또한 없었다. 하긴, 후에 제 목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알려주겠어.
개최자로서 그리고 고용인으로서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네게 제안을 하나 했다.
"너, 종 달고 다녀! 그리고 여기도 설치해 줘. 빠른 시일 내로 준비해 불편하지 않게."
모름지기 누군가를 모시는 입장이라면, 주인이 필요할 때 응답하는 것은 물론이요 부르지 않아도 미리 알아차려 반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네가 국왕의 꼭두각시라면 곧 내 것이 될 터인데, 지금 같은 태도로는 어림도 없지. 그렇지만 너는 생각보다 훨씬 몰지각했다. 감히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따위 깔보는 투로 대답했으니.
"제가 왜 그쪽의 불편을 해소해드려야 하죠?"
"이미 개최자 자격 실격인데 고용인 자격까지 실격당하고 싶은 건 아니지?"
"어이쿠, 화나셨나요? 어린 공주께서 뭐가 그리 불만이시련지?"
낯선 사람들 앞에선 되도록 정중한 모습만 보이려고 했건만, 너의 도를 넘은 무례한 언행에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한 나라의 후계인 만큼 권위를 지키며 네게 우아한 악수를 건넸다. 지켜보던 이들에겐 다르게 보였으려나? 내 발이 네 정강이에게 건넨 악수였으니까.
"어이쿠, 화나셨나요?"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더는 숨길 것이 없었기에 너와 여러 번 악수를 하게 되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1.
이곳에 와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술도 마시고, 앤과 시몬이 아닌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었다. 그중 가장 별났던 날은 모두의 몸이 바뀐 날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또 네게 말려든 걸까?―어려진 나는 여자의 몸을 가지게 된 너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 순간 왜일까, 이 성에서 겪은 일이 정신을 어지럽히기라도 한 것인지 이래선 안 된다고 느꼈다. 아무렴 정분을 나눈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침대에서 잠들었을 뿐, 너와 나 사이엔 어떤 따스한 감정도 없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곳이 나의 성이었다면, 상대가 네가 아니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까. 너에게 있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쉬이 상처받은 것은 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나를 어린애라 치부하며 아픈 곳을 서슴없이 찌르는, 이름도 모르는 네가 신경 쓰인 것은 언제부터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서히 나를 옥죄어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문득 호화로운 생활과 신하들이 그리워졌다. 아니, 왕과 그의 충신들은 필요 없어. 앤과 시몬, 너희가 보고 싶어. 내게 잘해준 사람만 그리운 건 이기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날이 갈수록 진해지는 향수(鄕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었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공주님,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요!'라며 주제넘게 나를 타박하는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지만, 차디찬 빗물만이 귀를 적실뿐이었다.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내 몰골을 걱정해줄 사람 같은 건 없으니. 서늘한 빗방울이 목을 치곤 핏줄을 따라 내려갔다. 목만 내놓고 있는 게 꼭 단두대에 오른 것 같았다.
아버지는 대체 무엇을 바라고 날 이 연회에 보낸 걸까. 철부지 딸의 갱생? 아니, 아니지 그저 상냥한 공주를 갖고 싶은 거겠지. 당신이 원하는 딸 같은 거 사라진 지 오래인데.
…이런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비가 눈가를 스쳐 볼을 어루만졌다. 쏴아아, 억세게도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아 더욱더 몸을 빼 그 품에 안기려고 했다. 그들은 미끄러운 손을 내밀었고, 내가 잡자마자 날 창틀 밖으로 던져버렸다. 배신당했다.
아버지가 주선한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는 마차 안. 이제 이런 자리도 지쳐간다. 혼기가 다 찬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지만 내가 훼방을 놓으니 오기라도 생긴 것인지 짝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허구한 날 나를 보내고 있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오늘은 분위기가 어땠냐고 물어보겠지. 그리고 나는, 그가 새겨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여태껏 나를 사랑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 권력이나 외모를 사모한 사람이 전부였지. 내 눈에는 그들의 생각이 훤히 보여. '지금은 참자. 저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공주를 내 것으로 만들면 어마어마한 권력이 손에 들어올 테니 그 후에 무희를 부르든 버릇을 고치든, 뭐, 겉모습은 반반하니 나쁘진 않으니까.' 상대가 아무리 정중하게 행동한다 한들 표정과 태도에서 다 느껴지거든. 오늘도 그랬어."
아버지는 분명 자신의 안목을 의심하는 거냐며 호통이나 칠 것이다.
궁에 도착했지만 웬일로 아버지가 나를 부르지 않아, 극심한 피로를 달랠 겸 내 방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며 휴식을 취하니 더러웠던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앤이 헐레벌떡 뛰어온 것도 모자라 답지 않게 문을 벌컥 열어재끼며 온갖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앤은 여전히 발만 동동 구르다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는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밀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가 그것을 다 읽기까지 얌전히 있었다.
글자 하나를 읽을 때마다 앤이 떤 요란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다 못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아버지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참느라고 손에 힘을 쥘 수밖에 없었고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는 결국 찢어졌다.
백성에게 알리노라.
알다시피 나의 딸, 올카 홀리나이트 공주는 웃음을 잃은 지 오래이니
아비 된 자로서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는가.
이에 그대들의 힘을 빌려 공주의 웃음을 찾고자 하니 깊이 새겨듣길 바라매
닷새 후 왕궁에 끝없는 웃음소리를 가져온 자에겐 내 친히 공주와 금은보화를 하사하겠노라.
아버지가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은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런 치사한 방법으로 날 엿먹일 줄이야. 그는 딸을 팔아넘기면서 자신의 아비다움도 챙길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찾아냈다. 귀족과 백성 사이에서 일컬어지는 올카 공주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탐욕과 연민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개중에는 순수하게 나의 웃음을 보고자 참석하는 이도 있을 수 있지만, 권력과 재물에 눈먼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욕심쟁이들은 광대를 고용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겠지. 이렇게 값싼 왕관 경매가 또 있을까?
험한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며 왕궁을 누비니 앤과 시몬은 나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쫓아왔다. 저 멀리서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우냐며 거드름을 피우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종이를 찢지 말 걸 그랬다. 그 귀하신 면상에 고이 진상해드렸어야 했는데.
나는 소리 질렀다. 이렇게 당신의 딸을 이용해가면서까지 잘난 위상을 높일 셈이냐고. 아버지는 시치미 떼며 '화내는 걸 보니 이번 만남도 별로였냐'라고 말을 돌렸고,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대답으로 알았는지 '닷새 후 백성들을 궁으로 부를 것이니 그리 알라' 통보하곤 유유히 떠나갔다.
곧 만찬이 이어졌으나 아버지를 보지도, 그의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그저 음식을 뭉개거나 버리고 있으니 그는 또 시작이라며 나를 나무랐다. 또 시작인 게 누군데. 포크를 집어던지는 것도 모자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니 아버지가 '오르카'라고 크게 불렀다. 나는 앤과 시몬을 더 크게 부르며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시몬은 잠시 방문 앞에 세워두고 앤과 함께 들어갔다. 갑자기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는 걸 도와달라고 하니 앤은 영문을 몰랐을 테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내가 옷장에서 '그 옷'을 잡자마자 모든 것을 알았을 테니 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은 다 입었고 이제 머리를 묶을 차례였지만, 앤 혼자선 내 풍성한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아 시몬을 들였다. 그 역시 내 차림을 보고는 상황을 얼추 깨달은 듯 중얼거리다가 앤을 도와 금방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제야 나는 국왕이 붙여놓은 우습지도 않은 벽보를 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수긍할 줄 알았지만, 시몬은 온갖 이유를 대며 이젠 밤중에 거리를 떠도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난 그의 말에 하나하나 반박했다.
첫 번째, 백성들은 내 얼굴을 알지 못한다. 두 번째, 밤늦은 시간이니 오히려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내 몸은 알아서 지킬 테니 정 따라오려면 방해하지 말고 망이나 잘 봐라. 네 번째,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요란스러우며 그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다섯 번째, 난 이렇게 팔려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섯 번째, 이 이상 쫑알대면 궁 밖으로 내쫓겠다.
시몬은 내 완벽한 말솜씨에 기가 죽었는지 뾰로통한 얼굴을 하며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심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날은 왔다. 매일 밤 광장에 나가 벽보를 떼었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니 입소문이 꽤 퍼졌던 모양이다. 대부분 구경꾼이었지만, 오늘이 마지막 무대라도 되는 양 화려하게 끼를 부리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실력 있는 재주꾼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재롱은 붉은 천 아래 곱게 떨어진 공주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에 조금의 보탬도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초조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마침내 만인이 내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남자에게 쏠렸다. 생전 받아본 적 없는 관심에 마른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한 저자를 보아하니 이제 마지막인 것이 분명했다. 그의 재간이 떨림으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을 목격한 자들이 탄식했다.
광대가 무대를 달궈놨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연극의 막을 올려야지. 나는 아버지를 보며 은근히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제 놀음은 끝나셨습니까?"
국왕은 찬사와 다름없는 일그러진 표정을 보냈고 자신감이 생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껏 연기했다.
"백성들이여, 사실 이 자리는 그대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왕께서 베푸는 연회였노라. 혹여 부담감에 많은 이들이 오지 않을까,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하다 공주의 웃음을 핑계 삼아 이런 계획을 하시니 어찌 성군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는가? 곧 성대한 연회가 시작될 터이니 먼 걸음을 헛되게 하지 말고, 오지 못한 자가 있다면 어서 알려 더 많은 이들이 오늘을 즐길 수 있게 하라."
아버지는 사색이 되는가 싶더니 조용했던 공기가 활기를 찾자 이내 허탕하게 웃고는 '이리 나를 띄워주니 쑥스럽구나. 여봐라, 어서 연회를 시작하라!'며 새로운 연극을 시작했다. 어떤 희극인도 임금보다 얼굴을 빨리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왕궁엔 끝없는 호통이 웃음소리를 대신했고 그 결과 나는 다른 연회에 보내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내 탓을 했다. 먼저 나를 부정해놓고는 내가 자신을 따르지 않으니 인형에 너무 의존해서 문제라며 테오를 버리고, 권력에 꼬이는 하루살이를 쫓아냈더니 받아들이지 못해서 문제라며 나를 공개 수배했다. 자신은 언제고 '아내도 잃고 딸마저 웃음을 잃은 가련한 왕'이었으면서 내가 단 한 번 백성 앞에서 교묘하게 망신 주었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아냈다. 아버지가 진작 나를 나로서 인정해주었다면 '효도하지 않는 돼먹지 못한 딸'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버려진 테오는 아저씨가 찾아주었지만, 버려진 나는 누가 찾아주지?
어머니를 좋아하는 만큼 '올카'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그래서 얌전히 있다가도 당신이 나를 '오르카'라고 부를 때면 화내고 짜증 내고 소리 지르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옷을 망가트리고 흙밭을 뒹굴었다, 그러다 음식을 던지고 접시를 깨트리는 것에 이르렀을 땐 시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멈칫하다가도, 당신의 부름에 기어코 그 짓을 단행했다. 그런 날 밤이면 테오나 유모의 품에서 서럽게 울곤 했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미안한 마음도, 눈물 흘리는 일도 점차 줄어들어 이젠 딱 맞다 못해 나를 조이는 옷이 되었다.
어느 날은 당신이 또 나를 '오르카'라고 부르는 것에 화가 나 옆에 있던 누군가를 쳤는데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하인이 들고 있던 뜨거운 차가 몸 위로 쏟아진 것이다. 주춤했지만, 눈썹은 금방 찡그려졌고 발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그 자리엔 괴로워하는 하인과 걱정하는 고용인, 경악을 금치 못하는 왕과 귀족만이 남게 되었다. 자 봐, 당신이 생각하는 오르카는 여기 없어. 이렇게 매정한 사람을 정말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그러나 악행들이 몸에 익은 것처럼, 아버지의 입에도 어머니의 이름이 익은 것 같았다.
처음 이 성에 왔을 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으니 모두 편히 쉴 수 있겠지. 혼자라는 건 별로였지만 언제나 나를 바라봐주는 귀여운 왕자님, 테오가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이 낙천적인 생각은 시간이 지나고 허접스러운 대우가 계속될수록 죽어갔다. 내 뜻대로 되던 세상을 벗어나 말동무도 없이 견뎌야 한다는 건 날 몹시 힘들게 했다. 아아, 나의 왕자님 실망하지 마세요. 당신께는 미안하지만 난 이미 너무 커버려서 당신과 말할 수 있는 순수함을 잃었는걸요.
권력을 노리는 자들을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누리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내가 공주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작 들고 일어섰겠지. 아니,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도 없었을 거야. 너를 만나고 나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처음엔 내 말을 듣지 않는 너에게 화가 났지만, 문득 그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곤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감당해야 했던 그들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궁에 돌아가면 그리운 앤과 시몬, 시종과 기사들에게 사과해야지. 물론 내가 이곳에 있는 한 너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첫걸음이자 또 다른 도약이 될 테니까. 사실 어느 순간부터 널 대할 때마다 분노나 죄책감이 아닌 복잡한 무엇인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알아챌 순 없었다. 너에게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걸까?
나를 구해준 것은 앤도 시몬도 포근한 잔디도 아닌 너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날 이후로 네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한 죄악감인지 그도 아니면 미운 정인지, 모임이 끝날 때면 종종 네 방으로 가 너의 상태를 살피곤 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오늘까지 심지어 물도 마시지 못한 너는 미세하게 마른 것도 같았다. 네가 깨어나길 간절히 빌었던 건, 나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기 때문도 있지만―이대로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네 눈동자를 응시할 수 없게 된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되잖아. 다행스럽게도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운명은 대가로 네 기억을 가져간 것 같았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네 태도는 분명, 내가 줄곧 요구하던 고용인다운 자세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날이 온다면 대단히 만족스러울 줄 알았건만, 다른 사람과 달랐던 네가 그들과 같아지니 위화감만 느껴졌다. 싫어.
넌 아직 낫지도 않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간식이 부족하다는 말에 넌 금세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내어 초콜릿 펜을 들고 달콤한 장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To Princess Olka
모든 게 너의 거짓말이었다. 운명도, 신도 아닌 너의 장난에 놀아났다고 생각하니 절로 화가 났지만, 내가 아는 태도로 맞받아치는 너를 보곤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렀을까? 우리는 서로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말을 몸짓까지 사용하며 공고히 했다. 네가 손가락으로 만든 작은 엑스자보다 크게, 팔을 교차하면서까지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분이 풀리지 않아, 비아냥거리는 투로 '네' 하며 밖으로 나가려는 네게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난 테오 같은 남자 만날 거라고!"
다음 날, 식탁 위에는 내 이름이 적힌 케이크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벌게진 얼굴이 참 보기 좋았을 것이다. 곧장 이름 부분만 파내어 접시에 옮겨놓고 네 얼굴을 생각하며 뭉개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이라고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더 꿍해졌다.
모임터에 손님이 하나둘 모이고, 넌 그사이 새로운 케이크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조그마한 불평을 속삭였다. 듣자 하니 애당초 왕들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갑작스레 받게 되어 불만스럽다는 거였다. 왕의 명령 때문에 따르겠다고 하는 네 모습은 어쩐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너도 불쌍하네."
"불쌍하게 본다…?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올카 님께서 더 불쌍하십니다."
"나 안 불쌍해."
"웃지 못하는 공주라…. 불쌍해라. 행복한 일도 즐거운 일도 없는, 누군가에게 상처만 받는."
"……아직 넌 날 동정할 자격 없어."
"그럴까요? 저는 늘 행복한 파티에서 웃고 있는데……. 올카 님은 아니신가 봅니다."
더 모임터에 있고 싶지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너를 노려보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숙이니 딱딱한 바닥이 나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웃지 못하는 공주."
결국 너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걸까. 날 공주가 아닌 '나'로 봐줬으면서, 항상 똑같이 대했으면서, 세상과는 달랐으면서, 그랬으면 너만큼은―
"다른 사람이랑 같은 말 하지 마."
중얼거렸다.
2.
어린아이가 되는 꿈을 꿨다. 손님들은 말했다.
"분명 알아채실 겁니다."
"아닙니다, 확실히 말씀하시면 상대방도 받아들일 겁니다!"
"상대가 정말 좋아한다면 올카 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실 거예요."
그런 사람은 어디 있는 걸까.
"그보다 올카 님, 웬일로 얌전하네요. ……철들었나."
"…그냥."
"사납지 않은 점은 좋지만, 지루하네요."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모임터를 나갔다.
"기운이 없을 뿐이야."
퍽퍽한 과자는 달콤했지만 먹을수록 나의 목을 막히게 했다. 우유가 절실히 필요했다. 왕궁이었다면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겠지. 거기선 지금 뭘 먹고 있을까? 혹시라도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흐름의 끝엔 고향이 있었다. 무기력은 몸을 짓누르며, '간식 접시들을 모조리 식탁 아래로 밀어서 깨트려. 그러면 식탁에 엎드릴 수 있어'라고 솔깃한 제안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나중에 네게 사과할 때 손톱만큼이라도 진정성이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임터에 있던 사람들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는지 산책을 하러 나갔다. 밤하늘이 아름답다며 같이 걷자고 말했지만, 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면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이 그려질 것이 분명하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나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았지만, 또한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창문 너머 풍경으로도 왕궁을 볼 수 있었다. 향긋한 꽃내음을 맡고, 소란스러운 하인의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큰다죠?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찰나의 괴리감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네가 우유를 흔들고 있었다. 환청이라고 여겼던 건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넌 우유를 내게 건네고는 아까부터 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블루베리 타르트를 들며 다가왔다.
"맛없나요?"
직접 평가라도 하려는 것처럼 한 입 먹고는 내게 물어왔다. 또 나를 약 올리려는 거지? 그 먹음직스러운 타르트가 날 위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단다. 너는 계속 내게 '날 위해 만든 거'라며 거짓말을 하지만 더는 속지 않을 거야.
"그럴 리 없어."
"왜죠?"
"넌…… 날 싫어하잖아."
환영을 볼 때부터 눈가를 간질이던 눈물은 전망이 밝은 탐험가였다. 진실을 보겠다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모든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온 한 방울이 내 뺨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착지했다.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내가 싫어한다고 한 적 있나요?"
"아무것도 아니라며……."
"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싫지는 않죠."
"…나한테만 형편없이 대했잖아."
"제가 만났던 분 중에서 제일 잘 대한 겁니다."
숨기려 했던 마음마저 전부 내뱉는 걸 보니 이젠 내 몸에게마저 미움을 산 모양이구나.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렸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면서 감정을 전했다.
"거짓말하지 마…!"
"올카 님은 재밌거든요."
재미라는 건 내겐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다. 헌데 왜 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날 아프게 하는 걸까. 눈물이 떨어지는 이유가 과연 그리움 때문일까?
"올카 님. 올카 님께서는 왜 저한테 그렇게 반응하시는 거죠?"
"내가 어떻게 반응했다고 그래?"
"때리고 때리고 때렸죠."
"그거야, 네가 고용인 주제에 얄밉게 굴어서…!"
"그리고 제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신경 쓰셨죠?"
어째서 넌 나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물어보는 걸까. 언제부터인지 몰라, 그냥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말 하나하나가 신경 쓰인단 말이야. 몰라, 그냥, 그냥….
난 울먹이고 있었다. 이래선 네가 말하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잖아.
"올카 님도 저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했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 왜? 미안해서? 단지 그게 다일까?
마음 한가운데서 무언가 휘몰아쳤지만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었기에 답답했다. 그 순간에도 조용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회오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모르는 겁니까."
"바보 같다고 생각해도 좋아. 자기 마음 하나 모르는 사람…."
나는 언제나 그랬다. 결국 나아지는 것도 없이 그저 아버지 탓만 하며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내가 싫어하던 그의 모습을 징그럽게 닮아버렸다. 이젠 달라져야 했고, 그것을 위해 똑바로 보아야 했다. 의문을 먹고 자란 저 커다란 바람을.
난 우유병을 식탁에 두고 멈출 생각을 않는 눈물을 닦았다. 너는 먹다 남은 타르트를 올려놓았다.
"생각하는 게 어리시니까요. 어리광쟁이."
"어리광쟁이 아냐. 나도 내가 할 일 정도는 할 줄 알아!"
너의 말에 찔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달라지겠다고 말하는 지금까지도 응석만 부릴 뿐이니까.
너는 가까이 다가와 한 손으로 벽을 쳐 내가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나는 이미 갇혀있는데.
"자신의 감정도 모르면서 다 컸다고? 어리니까 감정을 모르죠, 올카."
너무 놀라 딸꾹질이 다 나왔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허리를 숙여 다가오는 너의 붉은 눈을 당당히 마주 보려 했지만 네 시선이 내 심장에 박혔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내 붉어진 눈을 너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한번 물어보죠. 제가 싫은가요? 좋은가요?"
"싫진… 않아."
"나도 싫지는 않습니다. 올카님께서는 충분히 좋은 분이시니" 너는 나를 풀어주었다. "분명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나를 나로서 바라봐주는 건 너였다. 내가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해 지금까지 헤매고 있는 것처럼 너도 표현을 잘못 배운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이 회오리를 잠재울 방법을 알아. 버려진 나를 찾아줄 사람이 없다면 내가 찾으면 된다는 것도.
"좋은 사람 못 만나!" 믿음과 확신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네가 정말 나쁜 사람이잖아!"
"……."
"네가 짜증 나도록 못돼먹은 놈이라서, 좋은 사람은 못 된다고!"
너는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내 말을 곱씹는 것인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기를 잠깐, 방금 들은 말을 깨달은 듯한 네 표정은 퍽 우스워졌다.
"왜…. 왜, 왜. 저보다 좋은 사람이 어딨다고…. 물론 나쁘겠지만!"
"이 정도 말했으면 좀 알아먹으란 말이야, 이 멍청아…."
다시 한 번 생각에 빠진 너는 너 자신을 가리키며 "저요…? 저… 나?"라며 반복해서 물었다. 어쩌면 네 맘에도 바람이 일고 있는 걸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넌 무척 크게 웃기 시작했다.
"왜, 왜 웃는 거야!"
"세상에…. 저를 좋아할 분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럼 저도 좋습니다. 재밌기도 하고, 좋기도 하니."
"뭐가 좋다는 건데…?"
내가, 아니면 이 재밌는 상황이?
넌 기습적으로 내게 입 맞췄다.
"올카님이요."
3.
아무도 없는 쓸쓸한 모임터. 정적이 흐르는 연회장엔 외로운 피아노가 연주자를 찾고 있었다. 울적한 기분을 달랠 겸 마지막 연주자가 되어줄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중앙에 볼록 솟은 언덕에 호기심이 동했다. 사람일까? 에이, 설마.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언덕은 자신이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
난 드러누운 너를 내려다보며 이런 곳에서 자면 입이 돌아갈 거라고 충고해주었다. 그제야 눈을 뜬 너는 잠이 덜 깼는지 헛소리를 했다.
"아, 내 꿈이었죠."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일으켜주세요."
습관은 무섭다. 무례한 부탁이라는 생각에 표정이 일그러졌으니까. 그렇지만 이내 네가 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올카 님, 춤출래요?"
"출 줄은 알아?"
"알죠! 그보다 심심한데 같이 파티할래요? 골라요."
"춤을 춰야 해, 파티를 해야 해…?"
"파티를 하며 춤을 출래요?"
"그러자."
"올카 님은 키가 작아서, 되려나?"
"한 번 봐 봐, 되나 안 되나."
너는 춤추는 자세를 취하며 나를 도발했지만, 그 어깨에 손을 올리곤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우선 너에게 몸을 맡겨 흐름을 따라갔다.
"아… 올카님께서는 춤출 줄은 아시죠?"
"당연한 말을…."
이대로 노래도 관중도 없이 모든 것을 잊고 너와 춤을 추는 것도 좋았으련만,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런 질문을 들은 것을 보니 내게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즐거움인가 보다.
"올카 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실래요?"
"내가… 빨리 가길 원해?"
"나머지 분들도 모두 나가셔야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너는 다 알고 있었겠구나."
"아쉽나요?"
"이제 웃을만한 일이 생길 것 같았는데…."
"웃지 그래요?"
"웃게 해 줄래?"
시선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너에게로 향했다.
"웃게 해 드릴까요?"
"그럴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춤의 궤도를 바꾸었다. "그런데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게 뭐죠?"
"이제서야 묻는구나. 글쎄… 아직 잘 모르겠네. 그럼 너는? 좋아하는 게 뭐야?"
"음~ 좋아하는 거라. 간식이라든가 파티, 재밌는 거면 다 좋죠. 그리고 올카 님!"
네 낯부끄러운 말에 얼굴이 붉어지다가도 문득 두려워졌다. 네가 좋아하는 건 정말 나일까? 무서웠지만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모른 채 달콤한 독약을 먹고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넌… 정말로 내가 좋은 거야?"
"좋아하죠~ 다른 말로 해줘요? 사랑해요."
네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워서 스텝마저 녹아내렸다.
"어이쿠. 에이…, 못 추네."
"……방금 그 말 정말이야?"
"의심인가요?"
"난 정말 궁금해. 네가 좋아하는 게 나인지, 아님 내 왕관인지."
자신 없었다. 네가 아무리 재밌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도, 아니 오히려 순수하게 하나만을 좇기 때문에 권력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하고 화려한 연회를 열어 손님들이 항상 넘쳐나게 할 수도 있다. 권력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에 거짓된 삶을 제물로 바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왕관을 왜 좋아하죠? 왕관과 결혼하나요?"
"부와 명예를 둘러서 표현한 거잖아, 바보야…."
"솔직히 명예면 안 좋아하죠. 재미없잖아요."
"돈만 있으면 더 재밌게 살 수 있잖아?"
"돈으로 재미를 사는 건 아니죠. 재미는 느끼는 겁니다."
"그렇지만 왕이 되면 재밌는 일을 만들 수도 있어."
"왕은 지루해요.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일 뿐이죠."
"그래, 맞아…."
"그럼 올카님은요?"
"네 옷 같은 거 하나도 안 탐나."
피식 웃으며 답하자 너도 따라 웃었다.
"저도 왕관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왕관을 뺀 올카 님이 좋죠!"
"나도 옷 벗은 네가 좋아!" 아차 싶었다. "……아니, 아니. 오해하지 마!"
"변태."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으나 너는 꺄아아 소리치며 내게서 떨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니 그러니까…!"
"아직 일러요, 올카 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결혼하면 실컷 보여드리죠. 올카 님이 그렇게 적극적일 줄은."
"아, 정말!"
"그런 의미로, 같이 잘래요?"
넌 내가 제대로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잇더니 갑자기 드러눕고는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런 더러운 바닥에선 안 자!"
"에이, 수줍어하시긴."
내가 정말 잘 것이냐고 되묻자 너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올카 님은 공주네요. 바닥에서 자는 것도 못 하고,"
"푹신한 침대를 놔두고 뭐하러 바닥에서…."
"재밌으니까요."
"넌 재밌다면 뭐든 할 사람이구나."
"그렇죠."
피곤했는지 네가 하품을 했다. 자장가가 필요하냐는 내 물음에 대답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금방 잠들어버렸다. 아까도 이렇게 바닥에 누워있게 된 걸까? 신기한 마음에 너를 빤히 보다가 문득 이곳에 내려온 이유를 떠올렸다. 피아노가 나에게 손짓했고 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뭐, 듣는 사람이 없는 자장가도 나쁘진 않지."
거센 진동이 어서 일어나라며 나를 흔들었다. 성화에 못 이겨 눈을 뜨니 어이없게도 초목들이 빠르게 지나가며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침대에 있었는데, 꿈이라도 꾸는가 싶었지만 바람은 볼을 할퀴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꾸짖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내 입은 고장 난 인형처럼 '뭐'만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는 꼭 빨리 보고하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덕분에 일렬로 늘어선 상황들은 큰 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올카 공주는 잠든 상태 그대로 이불에 싸인 채 말 위에 실려 왕궁으로 행차하고 있다. 안 돼. 이대로 갈 순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단 말이야! 나를 태운 기사는 자신이 대신했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퍽이나! 내가 못 했는데 남이 대신한 인사가 무슨 소용이야? 따지려는 순간,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테오였다. 기사는 바람 소리에 단련이라도 됐는지 신경 써주는 그분이 테오냐고 물으며 돌아가면 각오해야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연회장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시몬에게 보낸 편지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 못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갈 수 없어. 난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공주님, 죽고 싶으신 겁니까?"
그의 당돌함은 나를 진정시키기는커녕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말 위에서 그렇게 몸부림치시면 제가 잡고 있어도 책임 못 집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그리고 이미 늦었습니다. 포기하십시오. 그 테오라는 남자 이제 다시는 못 만나는 거 아닙니까?"
"테오는 내가 좋아하는 거고,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거야. 절대 포기 못 해."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기사는 빨리 가지 말라는 명령에, 공주보다 군주가 더 무섭다며 말에게 채찍질을 했고, 그것은 나를 못마땅하게 만들었다.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니 마침 힘들어서 그만두려 했다며 꼭 해고해달라는 말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왜 내 주변엔 이런 녀석들뿐인 걸까. 한탄하며 기사의 태도를 나무라자 공주님이 좋아하는 것도 있느냐며 역으로 나를 비꼬았다.
난 이제 그 질문에 긍정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장을 지져야겠다고 혼잣말했다. 그 의미를 추궁하니―아니, 그럴 것도 없었다. 내 질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올카 공주가 좋아하는 게 생기면 장을 지지겠다는 내기를 했노라고 술술 대답하는 것도 모자라, 내가 웃지 않는다는 것에 너무 터무니없는 것을 걸어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넋두리까지 늘어놓았으니까.
"멈춰."
"예?"
"아니 내려. 지금 당장."
재차 명하니 기사는 가만히 있다가 말을 멈추고는 또 되물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신경질적인 대답에 그제야 죄송하다고 사과하곤 내리며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아니어도 옆의 두 사람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기에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이 서서 앞을 보았다. 기사는, 길은 말이 알고 있다며 다시 뵙자는 말을 끝으로 말(馬)의 허리를 살짝 쳤다.
우리는 곧장 왕궁에 도착했다. 내려올 나를 안전하게 받치기 위해 기사들이 기다렸지만, 무시하고 반대쪽으로 하마(下馬)하여 궁전으로 들어갔다. 찬바람이 이불 사이로 스며들었다.
"공주님…! 돌아오셨군요!"
시몬은 얼굴에 그리웠던 웃음을 담뿍 담고 나를 향해 뛰어왔지만,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때가 좋지 않았다. 상황 파악을 마친 그가 정중하게 길을 비켜섰다. 시몬의 뒤엔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국왕이 서 계셨다.
"하나뿐인 딸을 이렇게 대접해주시다니. 정말 기쁘네요."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손에서 놓자 잠옷만 입은 내 꼴이 드러났다. 일말의 죄책감은 들었던 건지 아니면 꾸중 거리가 생각났는지 아버지는 헛기침했다.
"네가 시몬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구나. 그곳에서 만났을 테니 당연히 왕자겠지. 어느 나라의 왕자더냐?"
"왕자 아닌데."
"그럼 설마… 한낱 시종인 것이냐!"
"'한낱' 시종도 아니야."
"그럼 적어도 귀족은 되겠지."
"……처음 보자마자 할 말이 그것뿐이야? 난… 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그거 하나뿐이야…?"
"너의 혼인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지 않느냐. 하나밖에 없는 내 핏줄이다. 너의 신랑이 곧 힘이지."
아버지라는 사람을 바라봤다. 나를 그런 곳까지 몰아내고는 결국 원하는 것은 부마일 뿐. 이골이 나다 못해 손이 다 떨렸다. 당신은 늘 그렇게만 생각하지. 변한 게 없구나.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그를 지나쳐 방으로 올라갔다. 시몬이 뒤따라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문을 세게 닫고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다 싫어……. 이제서야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다 싫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기에 유망한 탐험가는 왕궁을 구경할 생각도 못 하고 숨어버렸다. 이 눈치 없는 소리의 주인공은 시몬이겠지. 그도 왕의 명을 따르는 사람이니 금방 포기하고 내려갈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침대맡까지 온 그에게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런 태도는 이제 그만두려고 했는데.
"너 뭐야! 왜 마음대로 들어와!"
"노크했는데 반응이 없으셔서…."
"그럼 들어오지 말아야지!"
내가 베개를 던지자 시몬은 익숙하게 받아내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옷을 걸치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가지 않을 거라고 하니 그는 한 번만 같이 가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이 둔탱이 시몬. 이 상황에 나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겠어. 비련의 여인처럼 후련하게 울어보기라도 하게 나가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가 계속 매달릴 것을 알았기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시몬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고집을 꺾었다는 게 사뭇 기뻤는지 그는 나의 옷차림까지 걱정해주었다.
"어차피 아빠 보러 가는 거잖아. 그를 위해 꾸미고 싶진 않아."
"후회하셔도 전 모릅니다."
"후회 안 해. 오히려 당당하지. 날 이런 꼴로 데려온 건 아빠라는 작자니까."
시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끝으로 조용히 앞서 계단을 내려갔고, 그를 따라 마지막 층계에 다다르니 말소리가 들렸다. 그새 손님이 온 모양이지? 공주의 차림이 그게 뭐냐고 또 한소리 하겠네. 그럼 다시 연회로 보내던가.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잠옷을 살짝 들며 말했다.
"대체 왜 불렀어? 공주의 이런 차림을 또 보고 싶었나 봐?"
"그 파티에서 손버릇이 나빠진 모양이더구나."
터무니없는 의심에 화가 치솟아 험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내 혀를 괴롭혔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과하라며 보여준 대상이 바로 너였기 때문에.
"와, 잠옷 차림은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올카님."
믿을 수 없어서 그대로 얼었지만, 네 웃음을 느낀 순간 난 이미 너를 와락 안고 있었다.
"어이쿠…! 와…, 격렬하셔라, 이렇게 반기다니."
"당연하잖아…."
아버지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큰소리쳤다. 익숙하다, 익숙해. 시끄러운 국왕, 장미 향 가득한 왕궁, 가여운 시몬과 앤. 그렇지만 하나, 이다지도 친숙한 곳에 이질적인 네가 함께인 것이 너무 행복했다.
내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지만, 꼭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말했죠? 올카님께서 좋아하는 게 있다고."
"당장 떨어지지 못하겠느냐!"
"싫어! 내가 미쳤어? 안 떨어질 거야!"
아버지는 애꿎은 기사들에게 우리를 막으라며 소리쳤다. 분명 핏대가 올라 곧 터질 것 같은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겠지.
네가 속삭였다.
"올카 님, 얼굴 좀 들어보세요."
"왜…?"
고개를 들자 네가 입을 맞춰왔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다시 시작된 소란. 이건 정말 꿈인 걸까?
"자…. 도둑맞은 것도 찾았고" 네가 나를 들춰 안았다. "안녕~"
너는 해맑게 정문을 통과하고는 나를 말에 태우고 궁전을 떠났다. 뒤에선 내 옷차림을 걱정하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카 님. 선택하세요. 성에서 인형 놀이하는 떼쟁이가 되실래요? 아니면 저랑 같이 파티하실래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는 거야?
"성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적어도 지금 이 옷으로는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어."
"그럼 돌아갈래요?"
나는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너와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렇지만,
"난… 나쁜 딸로 남고 싶지 않아."
올카 홀리나이트는 어머니 오르카 노바크라윈과 무척이나 닮았지만 성격은 반대인 영애가 아니다. 그냥 올카일 뿐. 난 그 사실을 아버지의 입에서 들어야 했다. 그전에, 내 화풀이를 묵묵히 참아주었던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무엇보다―
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널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이대로 훌쩍 떠나버리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너를 공주 납치범으로 기록할 테고 나 역시 왕실의 오점으로 남겠지. 나는 그 누구도 감히 첨언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고 새로운 역사를 너와 함께 쓰고 싶다. 네가 너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젠 내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너는 달리던 말을 멈췄다.
"역시 착한 분이시네요. 이건 상."
너는 내게 사탕을 건네고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말을 돌렸다. 다시 돌아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우리의 환궁을 알리는 신하들에게서 어쩐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대로 멀리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산책 다녀왔습니다."
너는 활짝 웃다가 탄식했다. 시뻘겋게 얼굴을 붉힌 국왕을 보고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건 평소 내가 하던 것과 다르지 않겠지.
우리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는 내게 손짓하며 강압적으로 이리 오라 말했다. 그를 뚫어져라 보기만 했더니 어서 발을 움직이라고 한소리 들었다. 너는 이미 벽에 기대어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빠. 예전에 내가 웃는 모습 보고 싶다고 했지? 어머니와… 똑 닮았다고. 나 이제 웃고 싶어. 그런데 쟤 없으면 못 웃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냐…!"
"정말 짜증 나고 배려심도 없는 녀석이지만, 솔직히 아빠가 소개해 준 남자들보다 나을 거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정말로 '나'를 좋아해 주는걸."
아버지가 차라리 소리라도 질러주길 바랐다.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보여줄 테니 마음을 접으라고 꾸짖기를 바랐다. 그러면 당장에라도 이곳을 뛰쳐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아버지는 침묵하다가 내게 다가와 망토를 둘러주었다.
"춥다…. 어서 들어가거라."
"아빠…!"
"들어가라고 하였다."
나는 너를 흘깃 보고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잘못된 선택이었던 걸까. 우리의 귀환을 아쉬워했던 신하의 바람처럼 멀리 떠나버리는 게 좋았을까? 그대로 연회장으로 가 문을 꽁꽁 닫고 사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늦은 후회였다. 아냐, 지금이라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나를 응원하는 자가 있다면―아니, 앤과 시몬만이라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은 행복하지 않을까? 그곳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거야. 그래, 오늘 밤 궁전을 떠나자. 네가 이미 멀리 쫓겨났다면 이번에는 내가 널 찾아줄게. 그러니 괜찮아.
……괜찮을까? 하려던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게 과연 행복한 삶일까?
비슷한 고민에 끝없이 빠져있을 때, 네가 문이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마지막이야?"
"뭐하고 계셨나요? 제 생각했죠?"
"…도망칠 생각 했어."
"뭐," 네가 옆에 앉았다. "식은 언제 올릴래요?"
"설마… 아빠가?"
"왕은 어른이죠."
너는 나를 보며 웃더니 사뭇 단호하게 말했다.
"식 올리기 전에는 진도 나갈 생각 없어요."
"알았어!"
너와 있는 지금이 계속될 거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모든 걱정은 행복으로 바뀌어 내 입꼬리를 잡고 춤을 추었다. 너는 나를 안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눈이 아니라 안 춥죠?"
"그건 당연하잖아…."
네가 나를 보았다.
"올카야, 같이 여행 갈래?"
"공주님은 얻다 빼먹었어?"
"이제 곧 아내잖아요. 내 거니까." 네가 나를 안아주었다. "안 해야지."
잠깐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곧 너를 안았다. 테오보다 나을지도. 중얼거리니 문득 테오가 생각났다. 나의 귀여운 곰 인형.
"소포 보냈는데요. 옷들이랑 같이 전부 싸서."
"그거… 그거 내가 안고 자는 거 아냐!"
"제가 테오보다 안기 편하다면서요."
"그냥 장식품이야! 안는 거 아니라고…!"
"내가 테오 이겼네."
"그런 게 아니라니까!"
테오, 네가 부끄럽다는 건 아니야.
무의식적으로 변명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너는 이미 내 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보다 식은 언제로……. 내일 할래요?"
"…내 말 믿는 거지?"
"네, 네. 믿어요. 아…, 케이크 드실래요?"
"무슨 케이크?"
"아까 드리려고 만든 거 '실수로' 떨어트려서."
실수였다는 걸 강조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넌 바로 말을 바꾸었다. 너 역시 나 못지않은 제멋대로야.
"아니다. 이대로 자자. 졸려."
"…안고 잘 거야?"
넌 이번에도 대답하는가 싶더니 금세 잠에 빠져버렸다. 너에게 살짝 입맞춤하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깨진 않겠지? 감은 눈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테오 대신이니까."
언젠가부터 확신했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웃는 날이 온다면 그 꽃을 피운 사람은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던 곰 인형 같은 사람일 거라고.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줄 너는 분명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19.02.12
원래는 개올카 4주년으로 쓰려고 했는데 시간을 너무 초과해버렸다ㅠㅠ 예전에 썼던 거 토대로 만들어서 짜임새라던가 올카 내면세계도 잘 표현 못 한 거 같아서 너무 안타까워... 이런 걸 재고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은 이미 대략적인 줄거리를 짠 후의 일이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 주시겠지!!! 개올카ㅠ 보면서 개최자 말에 다시 설레고 그랬네ㅠ 개최자야 우리 올카가 많이 힘들게했지만 이제는 사과도 하고 잘 웃기도 할테니까 부디 잘 봐주렴ㅠㅠㅠ 그리고 개최자 필기체라도 보내준 그 글꼴.. 로그 수정하면서 변경 됐더라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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